1930년대, 만년필의 전성시대 시절에 한 획을 그었던 미국의 에버샤프 모델은 특유의 각진 디자인과 플런저 필러, 거기에 연성도를 조절할 수 있는 기능까지 탑재하여 에버샤프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글로벌화 되지 않았던 당시 독일에서도 각져있는 디자인이 출시되었는데 바로 위 모델이다. 몽블랑 빈티지 모델 중 가장 희소한 모델인데 에버샤프 도릭과 다른 점들이 몇가지 존재한다. 우선 디자인 요소에서는 각져있는 외관은 비슷하지만 배럴과 그립부 사이의 연결을 도릭 보다 더 자연스럽게, 완만하게 이어 배럴과 그립의 이질감이 적다. 도릭은 완만하지 않고 급격하게 각져있는 배럴에서 원형으로 바뀌기에 자연스러움은 덜한 편이다. 에버샤프는 플런저 타입과 레버 필러 등 크게 두가지 방식의 잉크 충전 방식이 적용되고 몽블랑은 푸쉬 노브 필러 방식이 적용된다. 1930년대 시기의 몽블랑은 마이스터스튁 기준 12x 라인업 생산 시절이라 고가라인과 동일한 푸쉬노브 필러가 적용되었다.
펜의 크기 자체는 124와 126의 중간 사이즈로 플랫 솔리드 에보나이트 피드가 장착되고 그립부 역시 12x 시리즈의 유려한 곡선을 그린다. 개인적으로 몽블랑의 해당 그립부 디자인의 그립감이 가장 좋은 편이다. 그립의 형태는 40년대로 넘어가면서 곡선이 더 완만해지고 50년대 들어서면서 수평으로 변경된다. 두툼한 그립감이라기 보다 손에 감기는 느낌의 그립감이라 선호하는 타입이다. 펜의 무게는 푸쉬노브 방식으로 굉장히 가벼운 편이고 전반적으로 12x 시리즈와 기본 구성은 비슷하다. 각져있는 캡과 배럴의 디자인은 외적으로도 단조로운 색상에 심플한 디테일을 가미한 느낌으로 은은한 매력을 주는데 단순히 디자인적인 요소 보다 중요한 부분이 바로 안정성이다. 책상위에 캡을 포스팅하지 않고 둔 경우 데굴데굴 굴러서 바닥에 떨어트린 경험을 다들 한번씩은 해보았을 것이다. 한번 경험하면 펜촉은 대부분 구부러져 그 다음부터는 굉장히 조심하게 되는데 각진 디자인은 아무렇게나 던져놔도 절대 굴러 떨어지지 않는다.
만년필의 밸런스는 4호까지는 캡을 끼우고 쓰는게 낫지만 그 이상의 사이즈는 캡을 끼우게 되면 길이를 초과하는 후방 무게 밸런스가 집중되어 필기시 손의 피로도가 급격히 커지게 된다. 따라서 4호를 초과하는 사이즈는 캡을 꽂지 않는 것을 추천하며 떨어트리지 않게 주의가 필요하다. 각진 배럴의 디자인은 이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어진다. 디자인적인 요소지만 실용적인 부분을 가미하기에 아주 효율적인 디자인으로 볼 수 있다. 거기에 몽블랑 초기 로고, 오리지날 원톤닙, 플랫 에보나이트 피드, 푸쉬노브 필러까지 조합된 만년필은 몽블랑의 초기 감성을 경험하기 충분하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부분은 이 펜의 필감이다. 1930년대 몽블랑을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경험해 본 사람은 없는데 그만큼 독특한 필감을 선사한다. 빈티지 EF닙이지만 펠리칸과 다르게 아주 거칠지 않고 살짝 쫀쫀한 필감과 연성감 그리고 미묘한 사각거림은 굉장히 중독적이다. 다른 부분들은 차치하더라도 필감 때문에라도 이 펜은 경험해보는걸 추천한다.
캡탑의 몽블랑 스타로고는 초기형 로고답게 투박하고 곡선이 고르지 않다. MONT와 BLANC 사이에 산이 그려진 로고는 최근 몽블랑에서도 빈티지 복각 제품에 항상 쓰는 로고인데 시계, 만년필 등 다양한 제품에 쓰이고 있다. 푸쉬노브 필러는 과거 빈티지 몽블랑 리뷰에서도 디테일하게 다뤘는데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버튼필러와 기본적인 구조는 비슷하나 사용성, 편의성을 더 높인 버전으로 생각하면 된다. 하단 노브를 돌리면 노브가 튀어나오는데 버튼 필러는 캡이 열려 따로 빼두어야하는데 이와 달리 일체형 타입이다. 버튼 필러의 버튼은 굉장히 작고 그 작은 버튼으로 배럴 내부의 프레스 바를 눌러줘야 해서 장력이 강하지만 푸쉬노브 필러는 버튼이 노브 전체이기에 더 적은 힘으로 충전이 가능하다. 한번 눌렀다 떼는 것 만으로도 잉크 충전이 이루어지고 충전량은 레버필러, 버튼필러 등과 비슷한 수준이다. 다만 프레스 바의 배치, 장력, 고무튜브 크기 등을 조정해주면 일반 컨버터 타입 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의 잉크가 충전된다.
하얀색 폰트의 몽블랑 로고만으로도 충분한 감성이 충족되지만 30년대 몽블랑의 핵심 기술과 필감을 경험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원통, 유선형 등의 디자인의 몽블랑만 봐오다가 폴리곤 형태의 디자인은 상당히 신선하다. 팩토리 세팅의 펜촉 마감은 완벽한데 이 시기의 몽블랑 닙은 미친 수준으로 봐도 될 정도다. 참고로 몽블랑 최고의 닙으로 꼽는 14c 250 닙 역시 1930년대 제작된 닙이다. 개인적으로 필감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요소 중 가장 중요시 생각하는 부분은 무게인데 그 가벼운 무게를 가장 가볍게 만들 수 있는 필러가 푸쉬노브 필러다. 배럴에 직접 잉크를 주입하는 피스톤 필러 시대 이전의 필러들 중 가장 완성도 높은 방식으로 생각한다. 3~40년대 초기형 피스톤 필러의 경우엔 아직까지는 체온에 의해 잉크 흐름을 완벽히 제어하지 못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배럴 내부에 별도로 잉크 튜브 안에 저장하는 방식은 이러한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마치 그래프로 본다면 계단형태이긴 하나 그 계단 첫부분이 살짝 내려갔다가 올라가는 모양새다. 어떠한 메커니즘이든 등장 초기엔 사소한 문제점들이 발생하다가 이후 개선되어 안정적으로 가게된다.
빈티지 세필닙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할텐데 마감이 좋은 개체를 찾기가 아주 어렵다. 최초 마감이 잘 이루어진 개체라도 상태가 좋지 못한 경우들이 대부분인데 애초에 EF닙 개체수도 많지 않다. 어느 브랜드든 마찬가지고 극세필을 선호하는 아시아인들에게는 굉장히 안타까운 부분이다. 아무리 좋은 만년필이더라도 그 펜의 상태에 따라서 필감이 좌우되는건 명백한 사실이다.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정말 좋은 명차도 20만, 30만 키로를 타고 관리되지 않았다면 국산 신형 준중형보다도 못한 승차감일 뿐이다. 내 리뷰들을 보고 상태가 엉망인 빈티지 만년필을 쓰고선 빈티지를 쓸 바엔 현행을 쓰겠다는 이들이 종종 있는데 부디 충분히 상태가 좋은 빈티지 만년필을 경험해보길 바란다. 상태만 최상이라면 아무리 저렴한 모델이라도 현행 수십만원 이상의 필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단순히 성향차이 문제가 아니라 만년필 문외한인 이들에게도 시필을 시켜주어도 마찬가지 결과였다. 만년필은 연식이 높을수록 더 나은 경험을 할 수 있는 물건이다. 이젠 필기구가 아닌 감성의 영역에 들어선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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