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특허로 손꼽히는 파커의 럭키커브 피드 시스템. 파커의 안정성 높은 피드는 19세기, 1890년대에도 유명세를 떨쳤다. 일명 깨끗한 만년필로 불리울 수 있었는데 이는 피드 안정성으로 인해 잉크가 새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기의 만년필은 아무래도 피드 안정성이 높지 않아 잉크가 피드를 통해 줄줄 새거나 아이드로퍼 방식인 경우엔 접속부에서 잉크가 스며나왔다. 그래서 만년필을 쓴다는 것은 손에 잉크 범벅이 되거나 옷에 얼룩이 생기는 등 더러워짐을 감수해야 했다. 오늘날 만년필 수리를 하는 이들의 손을 본다면 손에 잉크 얼룩이 항상 가득한데 그런 느낌과 비슷하달까. 나 역시도 만년필을 자주 사용하거나 수리를 하는 경우엔 손에 잉크가 항상 묻어있어 주위 사람들이 물어보곤 했다. 파커의 럭키커브는 기존 피드의 단점인 닙을 아래방향으로 두면 잉크를 제대로 머금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현상, 그리고 체온에 의해 잉크 흐름이 불량하거나 안주머니에 넣어놓으면 이 역시 체온에 의해 잉크가 뿜어져 나오는 현상을 해결해주었다.
파커의 럭키커브는 잉크 튜브 안에서 피드와의 연결 관이 구부러져 있어 직관적으로 흘러내리지 않고 오로지 모세관 현상으로만 공급되기에 과도한 공급을 방지하고 사용시에만 균일한 잉크흐름을 제공할 수 있었다. 위의 광고에서도 볼 수 있듯이 체온에 의해 잉크가 새어나오는 것을 방지하고 깨끗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하는 광고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완벽한 시스템으로 고객이 만족하지 않았을 경우 그 즉시 완전한 환불까지 약속했다. 완벽하고 신뢰있는 제품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럭키커브 시스템은 이후 20세기 초 출시한 파커 듀오폴드 라인업에도 적용되었으며 미국 만년필 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 파커는 디자인 뿐만 아니라 특허기술, 필링메커니즘 등 모든 방면에서 시장을 주도해 나갔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대중성을 신경쓰며 보급화했는데 일반대중과 군인들도 많이들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때 또다시 획기적인 시스템이 도입되었는데 조인트리스 구조이다. 만년필 구조에 조인트부분을 제거함으로써 파손위험성을 크게 낮추었다. 즉 내구성까지 잡아낸 것이다.
파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새로운 클립의 패러다임을 열었고 오늘날 파커 벡터에서 볼 수 있는 하단부 테이퍼링(더 좁아진 배럴)을 1900년대 초반에 적용하여 캡을 보다 깔끔하고 안정적으로 뒤에 꽂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파커 벡터가 엔트리급 보급형 모델로 치부될 수 있지만 1900년대 초반 혁신적인 디자인이 적용되었던 그 시절의 모습과 굉장히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시장에 쐐기를 박는 특허를 또 출원하는데 바로 셀프필링 메커니즘 카드를 꺼내들었다. 만년필의 기술을 보면 미국을 기준으로 잡으면 되는데 셀프필링 메커니즘의 시대를 연 것은 미국이 먼저다. 독일은 1930년대까지도 아이드로퍼 필러가 유지되고 있었을 정도로 늦은 변화를 보인다.(미국 최초의 셀프필링 메커니즘은 19세기 1800년대 후반에 등장했다.) 파커가 처음 선보인 셀프필링 메커니즘은 이전에 소개했던 콘클린의 크레센트 필러와 언뜻 비슷하지만 방식은 크게 다르다. 반원형 손잡이가 배럴에 달려있는 것은 비슷하지만 누르는 방식이 아니라 손잡이를 배럴 아래로 잡아 당기면 안에있는 고무 튜브를 누르면서 다시 팽창함과 동시에 잉크를 빨아들이는 구조이다. 이는 효율적으로 작용했고 아이드로퍼 방식이 만연하던 시장에 새로운 기술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어떤 시장이든 마찬가지인데 새로운 기술이 들어간 제품을 시장에 내놓을 때의 가격대는 굉장히 높게 형성이 되어있다. 그만큼 시간과 노력, 비용이 들어가고 독과점이 형성 되기 때문이다. 이후에 다른 업체들이 들어옴에 따라 가격경쟁이 시작되면서 가격이 낮아지며 보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늘날의 테슬라도 마찬가지인데 처음 등장했을 때엔 시장을 주도하고 전기차라는 아이템을 독식하고 있었으나 경쟁업체들의 등장으로 가격이 낮아지고 지금은 반값짜리 보급형 모델까지 출시했다. 이러한 경쟁은 시장을 주도하고 있던 대형 브랜드가 그 자리에서 안주하지 못하게 만들고 보다 나은 기술, 보다 나은 품질을 제공하게끔 만들어주는 원동력이 된다. 1900년대의 파커는 그 어느 회사도 따라오지 못할정도로 달려나갔고 그때의 노력이 오늘날까지 위상을 남길 수 있게 만들었다. 만년필이란 도구가 불필요해짐에 따라 회사는 몰락했지만 전성기 시절의 위상은 전세계 최정상이었다 해도 손색이 없다. Simple is the best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었고 기본에 충실하며 만년필이 무엇인지 보여준 브랜드이다. 너무나 기본에 충실한 제품들을 출시했기에 여러가지 테크닉이 들어간 독일제 만년필에 비하면 단순한 느낌이 있지만 그 기본에 충실한 탄탄한 기본을 사용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안정감, 평온함은 잊기 힘들다.
오늘날 가장 많은 빈티지 만년필이 남아있는 브랜드가 파커인데 그것이 어떠한 뜻을 의미하는지 곱씹어보면 무슨 느낌인지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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