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커는 역대 최고 매출을 찍었을 시점에 역사에 길이 남은 역작, 듀오폴드 모델을 출시하게 된다. 본래 미국 회사지만 오늘날 영국제로 인식이 강하게 남아있는데 이때 당시에 런던 사무실을 열었던 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 듀오폴드 등장 이전에 듀오폴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모델은 잭 나이프라는 모델이며 이는 잉크 누수 없는 밀폐형 캡이 특허로 등록되어 있다. 서술할 내용이 방대하여 다음 칼럼에서 소개하도록 한다. 후속작 듀오폴드는 하향세를 타고있던 만년필 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1910년대까지 왜 만년필 시장이 침체되고 있는지 의문이 들 것이다. 이는 당시의 만년필을 직접 사용해보면 알겠지만 차라리 딥펜을 쓰는게 일정하고 안정적으로 쓸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잉크를 주입하기 위해서는 스포이드를 사용해야 했고 손의 온도에 따라 잉크 흐름이 일정치 않았으며 잉크누수 문제도 완벽히 해결되지 못했다. 아직은 만년필이 만년필로써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지 못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빈티지 만년필 수집가들도 19세기 만년필은 실사용으로 쓰기 어려워 소장용으로 두는게 현실이다.
이전 칼럼에서 언급했듯이 듀오폴드 이전의 만년필들은 다채롭고 색다르고 독특한 기능들이 탑재되어 있어 경험해보는 재미는 있었으나 실사용이 어려운 현실적인 한계점이 존재했다. 듀오폴드 등장 기점으로 만년필은 실용성이 보장되었고 필기구 시장에서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하게 된다. 셀프필러를 구현함에 있어서 필요한 볼륨은 만년필 자체의 크기가 커지는 현상으로 이어졌고 듀오폴드의 이름, 빅레드는 이러한 이유에서 지어진 셈이다. 버튼필러를 이용하기에 길다란 고무튜브가 필요했고 많은 잉크주입량을 확보했지만 펜의 크기가 지나치게 커져 잉크 주입량을 포기한 쥬니어 모델, 레이디 모델을 별도로 출시했다. 시니어 모델은 오늘날 센테니얼, 쥬니어는 인터네셔널로 이어진다. 현행은 크기가 크나 작으나 동일한 컨버터가 들어가서 잉크 주입량에 차이는 없다. 당시의 만년필들은 빅레드처럼 크지 않았다. 크기도 커지면서 재료도 많이 들어가고 가격도 올라 당시 환율을 생각하더라도 엄청나게 비싼 가격으로 책정되었다. 파커 내부에서도 가격이 과도하다는 의견들이 많았지만 결국 변동없이 시장에 출시되었고 우려와는 다르게 성공하게 된다.
당시 대부분의 하드러버 재질의 만년필들은 염색 기술이 없기에 검정색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이때 등장한 붉은색 빅레드는 혁명적이었다. 거기에 타사대비 방대한 잉크충전량, 커다란 금촉은 재력가들의 관심을 끄는데 충분했다. 거기에 완벽한 품질, 럭키커브 피드의 안정성 등 비싼 가격을 지불하고 높은 수준, 품질의 제품을 구매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기본에 충실했던 듀오폴드는 그렇게 성공하게 된다. 캡은 나사산 깊히 견고하게 잠기고 커다란 펜촉은 필감을 극대화하기 충분했으며 럭키커브 피드는 안정적으로 잉크흐름을 가져다주었고 고무튜브와 배럴을 분리함으로써 체온에 따른 흐름 변화도 차단했다. 거기에 셀프필러 기능을 추가하고 개성 넘치는 붉은색 디자인까지. 듀오폴드가 등장하던 시기에 다른 여러가지 모델들도 있었으나 그 어떠한 모델도 듀오폴드의 매출을 넘기지 못하였고 파커는 듀오폴드에 집중하여 30여가지가 넘는 다양한 버전의 듀오폴드를 선보이게 된다. 전작 잭나이프를 초월하는 성적을 거두어 수집가들 사이에서 잭나이프에 대한 위상도 높은 편이다. 잭나이프 후속작임을 증명하는 부분은 잭나이프 25 모델을 보면 확인할 수 있는데 프로토타입 모델 중 잭나이프 25 모델을 개량한 개체가 존재한다.
듀오폴드의 쥬니어, 레이디 모델들도 부유층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으며 듀오폴드 샤프까지 출시하며 샤프 시장을 주도하고 있던 에버샤프의 모델까지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그만큼 1920년대 초반에는 붉은색 폭풍이 휘몰아 치고 있었다. 크레센트 필러 개념은 레버필러로 이어지고 듀오폴드의 버튼필러는 원리 자체는 동일하지만 배럴 외부에 충전 메커니즘을 노출하지 않음으로써 깔끔한 디자인을 가져갈 수 있었다. 셀프필러 시대가 도래하면서 충전 버튼이 외부로 노출되는 디자인이 대부분이었는데 빅레드의 블라인드 캡 방식으로 숨겨놓는 구조는 역시 시장에서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안전하게 잠궈줌으로써 실수로 눌려 잉크가 샐 염려도 없었고 안정적이었다. 잉크 흐름의 안정성, 잉크충전의 안정성, 캡의 밀폐력까지 모든 부분에서 실용적이고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견고함 덕분에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실사용이 가능할 정도의 품질을 보여준다. 나 역시도 애용하는 만년필 중 하나이며 실사용기로도 여러자루 사용중이다. 가장 기본적이고 트래디셔널하지만 그 기본은 절대 가볍지 않고 아주 단단한 느낌을 준다. 특히나 거대한 닙에서 전달되는 필감은 굉장히 직관적이다. 오늘날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만년필들을 보면 대부분 대형닙이 장착되어 있다. 몽블랑 149, 워터맨 패트리션, 파커 듀오폴드 등등. 그만큼 닙이 클수록 손 끝에 전달되는 펜촉의 필감이 커지기에 당연한 현상이다.
20세기 만년필 전쟁의 서막을 올린 만년필은 파커 듀오폴드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며 현재까지도 파커의 플래그쉽 모델로 자리잡고 있는 불후의 명작임은 분명하다. 물론 현행 듀오폴드와는 완전히 다른 만년필이니 이 감동을 느껴보고자 한다면 필히 빈티지 모델을 써보기 바란다. 빅레드가 단종되고 후기 보급형 듀오폴드 모델들이 출시되었으나 사실상 빅레드의 품질과 감동을 느끼기엔 역부족이다. 다만 버튼필러의 내구성이 레버필러에 비해선 약한 편이라 버튼필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하드러버 재질로 제작되어 변색 우려도 있으니 이런저런 단점들을 공부하고 본인에게 잘 맞을지 고민해보길 바란다. 버튼필러를 개선한 몽블랑의 푸쉬노브 필러를 경험해보았다면 버튼 필러에 대한 감동을 느끼긴 어려우며 잉크 흐름이 워낙 좋아 주입량 대비 사용량이 부족한 편이다. 장점이 있으면 그만큼 단점도 존재하므로 다양한 만년필들을 써보며 본인에게 중요한 기준을 잘 잡아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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