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펜촉의 티핑 마모에 대한 이야기인데 만년필 팁에 용접되는 팁은 저가형 모델이 아니라면 이리듐, 오스뮴 등의 내마모성이 강한 합금이다. 따라서 장편 소설가가 아닌 이상 매일 쓴다 한들 리티핑이 필요할 정도로 마모가 일어나서 쓰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지 않으니 펜촉 마모에 대한 걱정은 1도 할 필요가 없다. 빈티지 만년필 경우에도 티핑이 마모되어 다 닳은 것 처럼 보이는 개체들이 있으나 대.부.분.이 티핑 용접이 일정하게 되지 않은 것일 뿐이다. 간혹 정말 티핑이 갈려있어 마모된 것 처럼 보이는 개체들은 실사용으로 인한 마모가 아닌 진짜로 사포에 갈린 경우가 90%다. 현시점 만년필을 구입하여 티핑이 마모될걸 걱정하고 아껴 쓰는 행위는 일절 하지 않아도 된다. 빈티지 팁 마감 불량으로 인해 얕게 용접된 경우라도 다 닳을 때 까지 절대 쓰지 못할테니 사포 위에 글을 쓰는게 아닌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참고로 빈티지 만년필에나 이리듐이 사용되고 현행은 비교적 저렴한 루테늄, 텅스텐 등의 대체재가 사용된다. 이리듐 각인만을 새겨넣을 뿐이다. 또한 금촉이 아닌 경우엔 티핑 용접이 아예 없는 펜촉들도 존재한다.
바로 위 첫번째 사진을 보면 티핑이 일정하고 깊게 덮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간혹 좌우 밸런스도 맞지 않고 길이도 짧게 덮여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동일 연식의 다른 개체와 비교해보면 마모된 것이 아닌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동일 연식 다른 개체와 닙 크기, 길이를 비교해도 0.1mm까지 동일하고 티핑이 덮인 색상을 닙과 동일하게 바꿔서 비교해도 쉐잎 자체의 싱크를 99% 보여준다. 수작업으로 인한 티핑 마감의 편차일 뿐 마모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개체편차를 수도없이 봐왔고 직접 써보고 경험했다. 미관상으로는 필감에 문제가 있어 보이지만 직접 써봐도 걸리거나 거칠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이 써봐도 같은 결과를 확인했다. 빈티지 펜촉을 보고선 마모 운운하는 일부 사람들은 애초에 빈티지 개체 편차에 대한 이해도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모가 일어나서 펜촉이 짧아질 정도라면 과거 빈티지 만년필들은 티핑이 얇게 들어가기 때문에 아예 벗겨져서 펜촉이 드러나야 정상이다. 아래 사진들을 보더라도 티핑이 끝선에만 발리거나 마지막 사진처럼 좌측만 짧게 발리는 예시들을 볼 수 있다. 마모는 크게 없지만 티핑 마감의 편차일 뿐이라는 것을 직접 확인해보길 바란다.
펜촉이 크면 클수록 티핑에 따른 필감 차이도 커지는데 대표모델인 몽블랑 149로 비교해보고자 한다. 우선 가장 위의 사진은 60년대 149이고 두번째는 70년대 149 모델이다. 첫번째 두번째 사진 모두 동일한 필압으로 필기했지만 필형가 미묘하게 다른 모습이다. 획들의 끝선을 보면 더 구분이 되는데 60년대는 끝선의 처리가 더 극적으로 얇아지지만 70년대는 상대적으로 획들이 일정한 편이다. 이는 티핑 끝머리 부분의 가공 차이에서 발생하는데 60년대는 뱃머리 형태로 포인트가 뾰족하게 마감되는 반면 70년대는 둥글게 마감된다. 즉 60년대의 티핑이 필각을 높였을 때 종이와 맞닿는 부분이 뾰족해지는데 이로인해 종이와의 저항감이 커지게 된다. 70년대는 팁 끝부분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마감되어 부드럽게 그어지게 된다. 즉 저항감이 줄어들어 부드럽게 써진다. 필기시 60년대는 한획 한획 정갈하게 그을 수 있지만 70년대는 저항감 없이 부드럽게 나아가 버려 절제가 필요하다. 개인적으로는 저항감 있는 필감에 적응되어 70년대를 쥐었을 때 불안정하게 필기하게 된다. 물론 취향 차이라 70년대가 필기 피로도가 적으며 술술 써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 장점들이 있다. 필각을 낮추었을 때도 달라지는데 60년대는 티핑의 뱃면이 완만하게 떨어지지만 70년대는 곡률이 크게 떨어진다. 이런 면에서 70년대는 어느 필각에서든 비슷한 필감을 느낄 수 있다. 70년대는 필각이 낮아지면 완전히 다른 필감을 주는데 곡률이 완만하기에 종이와 맞닿는 면적이 넓어 저항감은 70년대보다 큰 편이다. 두 펜 모두 연성이라 필압을 주었을 때 필감도 달라지고 획도 달라지는데 60년대의 티핑 형태가 더 다채로운 획과 필감을 느낄 수 있다. 60년대 경우에 필각을 높인 상태에서 필압을 주게되면 슬릿이 열리고 타인이 들리면서 종이와 닿는 티핑은 뱃면이 되기에 아무래도 필각을 높여 쓰는게 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단순 6-70년대 비교이며 50년대, 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티핑의 가공 형태가 또 달라지기 때문에 한정된 비교분석인 점을 명심하길 바란다. pre war 연식으로 가게되면 티핑 자체가 용접이 아닌 거의 코팅 수준으로만 얇게 들어가므로 M닙에서도 큰 저항감을 느낄 수 있다. 좌우 가공인 뱃머리형태 끝선이 어떤 형태라고 한들 오늘날 티핑 형태인 상하로 두툼해지는 가공이 아니므로(상하 높이 변화없음) 저항감은 대부분 큰편이다. 오늘날 만년필 티핑이 물방울 모양을 하는 것은 상하 면적을 넓혀 구체형태로 만들어 보다 부드러운 필감을 주려는 의도이기 때문이다. 현행 만년필도 다른 필기구 대비 부드러우면서도 은밀하게 사각거리는 필감이 나는 이유는 바로 슬릿이 미세하게 벌어지면서 티핑의 안쪽 면, 가공되지 않은 단면이 종이를 긁기 때문이다. 티핑 바깥면을 아무리 부드럽게 가공한다 한들 맞닿는 면을 가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티핑 가공 변경은 볼펜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
만년필 취향은 크게 두갈래로 나뉘는데 부드러운 필감이냐 사각거리는 필감이냐로 결정된다. 단순히 부드럽기만 한 필감을 찾는다면 만년필이 아닌 다른 필기구에서 찾는게 더 쉽다. 부드러우면서도 사각거리는 묘한 필감 때문에 만년필을 찾는 이들이 생기는 것이고 그러한 필감은 경성이 아닌 연성 닙에서 더 커지게 된다. 근래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린 만년필 모델 역시 연성닙이 특징인 파일럿 에라보 만년필인 점을 보더라도 만년필다운 필감은 연성쪽으로 기울고 있다. 참고로 파일럿의 에라보, 저스터스 모두 1970년대 모델이 오리지날이며 2013년 복각되어 출시된 복각품들이다. 일본 뿐만 아니라 유럽, 미국에서도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있으며 다른 일본 브랜드들 역시 성공적인 복각을 해내고 있다. 파커의 필살기였던 파커51 복각은 영웅100 보다도 못한 결과를 보여준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필체를 표현함에 있어서 강약의 뉘앙스, 즉 맨손으로 타이포그래피를 하기 위해서는 연성닙이 필수적이다. 영문 뿐만 아니라 한자 역시 붓을 통해 획을 조절하여 삐침획과 치킴획을 그어내야 하는데 그때 연성닙은 효과적으로 표현해낼 수 있다. 손글씨 디자인인 캘리그래피 역시 연성펜촉들이 많이 활용되고 있으며 단순히 보여지는 것 뿐만 아니라 손끝으로 전해지는 손맛에 있어서도 연성닙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연성펜촉은 쓰기 어렵고 부담스럽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한번 써보면 다시 경성닙으로 돌아가기 힘든 매력을 지니고 있다. 바로 펜촉의 경도가 티핑 다음으로 필감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다. 연성감은 브랜드, 모델, 연식에 따라 정도가 다 다르고 사용에 따른 금속피로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같은 연식의 빈티지 펜을 쓸 때 어떤 개체는 엄청난 연성이지만 다른 개체는 더 단단한 경우도 있다. 일단은 연성감이 크다면 필압에 따라서 조절이 가능하지만 연성감이 약하다면 슬릿이 벌어지는 한계점이 있기에 획 표현이 제한적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모델이 파일럿 저스터스 95 만년필이다. 과거엔 에버샤프 도릭에서도 출시했었다. 슬릿 위에 금속 판을 덧대어 슬릿이 벌어지는 정도를 조절하는데 기본 닙 자체는 풀 플렉시블 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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