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과 만년필의 감성적 측면에서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전자제품은 쓰면 쓸수록 성능이 저하되고 만년필은 점차 길들여진다는 점이다. 21세기의 공산품들은 20세기와는 생산정책 자체가 다른데 제품이 오랫동안 판매되고 수명이 길어 좋은 제품을 하나 사서 오래 쓴다는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조기에 단종되어 신제품을 출시하고 기존의 제품과는 확연히 다른 디자인을 내어 트렌드를 바꿔버리는 시도까지 이어진다. 과거엔 오래 쓰지 못하게끔 하기 위하여 제품 수명을 줄이는 행태를 보이기도 하였으나 이는 제품이미지 하락 우려로 인해 조기단종이라는 정책으로 우회하고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제품들의 수명도 짧아지고 생산기간도 짧아진건 명백한 사실이다. 또한 단순한 배터리 교체와 같은 수리도 소비자들이 직접 할 수 없도록 막아버리는 설계까지 나왔을 정도인데 스마트폰의 배터리가 대표적이다. 일체형이라 한들 과거 배터리만 따로 빼내어 충전하는 스마트폰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직접 분해해보더라도 간단한 작업이다. 하지만 이를 차단하였고 조기단종 시켜 사설수리업체를 모른다면 신제품을 구매할 수 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또한 수리보다 신제품을 구매하는 비율이 높아진 이유도 수리가격이 새로 사는 것 만큼의 값을 지불해야 할 정도로 비싸기 때문이다. 이에 맞물려 수명이 다할때 쯤에 신제품이 항상 출시된다.(스마트폰 신형출시 텀이 1~2년인 이유, 보증기간 역시 2년 내 종료)
앞선 이야기를 한 이유는 미디움닙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만년필 한자루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선 진득하게 오랜기간 써봐야 알 수 있다. 잠깐 한두문장 써보는걸로 그 만년필의 필감에 대해서 논하기엔 무리가 큰데 단순히 펜촉과 종이가 맞닿는 느낌을 필감으로 정의하기엔 중요한 무언가가 빠진 느낌이다. 티핑과 종이가 맞닿는 감촉만을 따진다면 다른 볼펜이나 수성펜과 다를바 없다. 슬릿의 벌어지는 정도, 필각에 따라 생기는 단차, 이리듐 마모에 따른 변화 등 만년필의 필감은 느낄 수 있는 요소가 더욱 다양하다는 것이다. 새만년필과 길들여진 만년필의 차이는 굉장히 크다. 같은 모델의 만년필을 수년간 써온 개체와 새것을 비교해서 시필해보면 그 차이는 더욱 크게 느껴진다. 10년정도 꾸준히 써온 만년필이 한자루 있는데 그 만년필의 첫 필감은 마치 딥펜처럼 거칠었고 한때는 부드러웠으며 지금은 종이에 달라붙는 듯한 쫀득한 필감을 보여준다. 길들여짐 과정에서 가장 큰 재미를 볼 수 있는 펜촉 사이즈가 바로 미디움 포인트다. EF, F 등의 세필닙은 길들여짐 과정이 비교적 짧으며 마모된 펜촉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제한적이다. 이는 종이와 맞닿는 티핑 면적이 좁기 때문인데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아예 B, BB닙의 경우엔 어떠할까? 아주 두꺼운 펜촉도 내 손에 맞는 느낌이 아니라 펜촉에 맞게끔 쓰게 되는데 이는 라운드 형태의 티핑 마감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포인트가 커스텀 만년필의 판매량이다. 커스텀 만년필로 유명한 나카야에서 가장 많이 선택되는 닙 사이즈가 太닙이다. 일본 기준 B닙이지만 실 수치 기준으로는 유럽제 M닙과 비슷하다. EF, F닙엔 커스텀 가공을 해봤자 큰차이를 느끼긴 어렵다. 물론 기본닙과 비교하면 구분은 가능하지만 드라마틱한 차이를 느끼기가 어렵다. 이게 바로 미디움 포인트 닙의 미학이라는 것이다. 라운드 쉐잎의 티핑 마감 중 가장 두꺼운 사이즈인 미디움닙. 어느 필각에서든 자유롭게 쓸 수 있기에 길들여짐이 수월하며 길들여졌을 때의 감촉이 가장 크게 느껴진다. 영어권 나라의 글자가 두꺼운 획이 잘 어울리는 이유로 미디움 닙 판매량이 높은데 굉장히 압도적인 차이로 높다. 한정판 만년필을 출시해도 최소 70%, 대부분 90% 비중이 미디움으로 생산 판매된다.(브랜드에 따른 차이 존재) 한자권 문자가 세필이 잘 어울리는 이유로 아시아에선 EF, F가 대세이지만 필감을 놓고 본다면 M닙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과거 펜스토리샵에서도 주인장의 가치관에 의해 F닙 이상의 펜촉만을 판매했던 때도 있었을 정도다. 물론 국내 시장의 현실에 부딪혀 EF닙 판매를 피할 수는 없게 되었다.
빈티지 만년필의 경우엔 M닙이 현행 F닙 수준이라 유럽에서는 빈티지는 B닙 이상을 선호하는 경향이 크다. 또한 닙 사이즈가 더욱 세분화 되어 M닙 보다 두꺼운 MM닙도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본인이 만년필 펜촉을 길들이는 재미를 느끼고 싶다면 라운드 쉐잎 중 가장 두꺼운 펜촉 사이즈를 고르는걸 추천한다. 나 역시 옛날엔 만년필 구매시 무조건 EF닙만을 선택했지만 지금은 각 닙 사이즈에 따른 매력이 각기 다르기에 편식하지 않게 되었다. 티핑의 면적이 넓어질수록 같이 높아져야 하는 요소가 있는데 바로 잉크 흐름이다. 펜촉 사이즈는 두껍지만 잉크 흐름이 좋지 않다면 굉장히 뻑뻑한 느낌으로 글을 쓰게 된다. 심한 경우는 헛발질이 나는 것인데 그어지는 획이 두꺼운 만큼 더 많은 잉크량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흐름이 좋은 잉크를 쓰는 것을 추천한다. 태필은 잉크의 수막현상과 함께 어우러졌을 때 가장 이상적인 필감을 내준다. 연성감은 오히려 세필일수록 커지는게 매력이 있는데 획의 변화도가 극대화 되기 때문이다. 티핑이 두꺼워지면 종이와 맞닿는 감촉 자체가 매력이기에 슬릿이 벌어지지 않아도 충분하다.(연성감 없는게 오히려 좋게 느껴진다)
닙 사이즈에 따른 용도를 대략적으로 구분한다면 다음과 같다. 노트 필기용은 EF닙, 다이어리나 낙서용 F닙, 큰 노트에 필사 M닙, 캘리그래피 B닙~. 정해진 것은 없고 본인 취향에 맞게 쓰면 되지만 노트나 다이어리는 잉크흐름이 과한 경우 번짐이나 비침이 있는 경우가 많으니 만년필 사용이 되는지를 필히 체크할 필요가 있다. 세필용도에서 태필용도로 쓰는 것은 크게 상관 없지만 태필용도에서 세필용도로 내려가는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 지금까지 말한 미디움닙에 대한 매력을 느끼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필기량이 많지 않다면 수년이 걸릴 수 있다. 커스텀 만년필이라는 대안도 있지만 본인이 새것을 구매해서 본인의 손에 맞게 오랫동안 사용해가며 길들이는 재미를 느껴보길 바란다. 쉽게 버려지지 않는 물건에 대한 애착을 느껴보길 바란다. 본인 손에 맞게 길들여진 만년필이라면 구매 가격에 배를 줘도 팔고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더 비싼 브랜드 만년필이 부럽지 않게 될 것이다. 만년필은 가격이 중요한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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