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촉의 연성감을 조절할 수 있는 만년필이라면 현행 파일럿사의 저스터스 95 모델을 떠올릴 것이다. 저스터스 모델 출시일이 2013년도인데 출시당시 혁신적인 기능이라며 뜨거운 반응을 보였기도 했다. 하지만 빈티지 만년필을 수집하는 이들은 에버샤프 도릭의 카피제품이라는 인식을 지우긴 어려웠다. (참고로 저스터스 모델은 80년대 최초 등장했다가 13년도 리뉴얼되어 재출시 하였다.) 두 모델의 연성감 조절 원리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연성닙 위에 금속 바를 슬릿에 갖다 댐으로써 깊어지면 슬릿이 벌어지는 각을 점점 좁혀가면서 연성감을 조절하는 것이다. 간혹 도릭과 저스터스를 비교하며 저스터스만이 손에 잉크를 묻히지 않고 조절 가능하다고 하는데 후기형 도릭은 금속 프레스바가 그립 하단부에 위치하여 닙에 손대지 않고 조절이 가능하다. 에버샤프는 1931년도에 해당 기능에 대해서 특허를 출원하였고 다음 해 32년도에 시장에 출시되었다. 당시 미국의 만년필 시장은 춘추전국 시대와 같이 다양한 브랜드들이 쏟아지고 있었고 수많은 상품들 중에서 눈에 띄기 위해서는 참신하고 독창적인 기능을 내장해야만 했다. 그런 결과물이 수십년 앞선 연성도 조절 기능을 시장에 선보인 것이다.
에버샤프 브랜드는 브랜드명처럼 샤프펜슬 전문제조업체였는데 사업확장을 통해 만년필 제조에도 뛰어들었다. 시작은 좋았으나 2차대전 이후 파커사에 인수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이탈리아의 Emmanuel Caltagirone가 상표권을 사들여 다시 시장에 들어왔다. 대표적으로 이탈리아 감성 가득히 채워 도릭 모델을 복각하였으나 다소 난해한 방식의 플랜저 타입으로(잉크 주입시 핀셋 사용) 큰 관심을 얻지는 못하였다. 현행 유럽 제품들 중 빈티지 요소가 가미된 모델들은 거진 이탈리아 회사 제품으로 보면 된다. 전성기 시절의 제품들을 보면 펜의 디자인이 항상 화려했는데 각진 배럴, 다양한 패턴의 캡 밴드 등을 볼 수 있다. 물론 품질도 훌륭해서 오랜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보존되어 빈티지 컬렉터들 사이에서 재조명 받고있다. 다만 메이저 브랜드만큼의 판매량을 올리진 못하여서 남아있는 개체수가 적어 접근성은 다소 낮은 편이다. 도릭 어드저스터블 모델은 크게 2가지 연식으로 구분되는데 1세대, 2세대로 나뉜다. 위의 모델은 2세대 모델이며 1세대 모델과의 차이점은 닙을 잡아주는 상단의 금속 바 디자인이다. 1세대 모델은 집 모양에 가운데가 비어있지만 2세대 모델은 위의 사진처럼 길다란 바 형태를 이룬다. 닙 사이즈는 3~10으로 나뉘는데 3 밑의 사이즈는 확인되지 않고있다. 숫자가 커질수록 닙 사이즈와 펜의 사이즈가 커지는데 배럴의 사이즈는 구간별 증감이 이루어지고 닙은 호수마다 차이가 난다.
위의 사진 모델은 2세대로 호수로 구분되지 않고 쥬니어, 오버사이즈 등 펜 자체 크기로 구분한다. 오버사이즈 모델로 가장 큰 닙이 장착되어 있다. 워터맨의 패트리션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인데 배럴에 꽉 들어차는 닙 크기를 볼 수 있다. 패트리션의 필감이 인상 깊었던 점이 얄쌍한 배럴과 거대한 대형닙의 콜라보였기에 도릭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에보나이트 피드로 잉크흐름은 충분하고 연성도를 최대치로 했을 땐 웻누들 수준의 필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다가 일반필기가 필요한 경우 연성도를 낮춰 사용하면 슬릿이 벌어지는 것을 최소화하여 일정하게 사용이 가능하다. 닙의 기본적인 세팅은 풀플렉시블이기에 애초에 경성닙인 모델과의 필기감 차이는 존재한다. 그래도 이정도 수준으로 조절 가능하다면 연성과 경성을 모두 선호하는 이들에겐 필수 기능이 아닐까. 잉크 충전 타입은 크게 레버필러와 플랜저타입 두가지로 나뉜다. 플랜저 타입의 개체들은 대부분 내부의 밀폐력이 떨어져있어 오링 교체 등의 유지보수가 필요하다. 레버필러 역시 내부의 러버색이 삭아있는 경우가 다반사인데다가 연식이 90년 정도라 수리되지 않은 펜이라면 교체할 부품을 준비해야 한다.
위 사진은 1979년 저스터스 모델에 대한 특허이다. 현행 모델들 중 간혹 신기한 기능이거나 독특한 잉크충전 방식을 장착하여 출시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살펴보면 대부분이 1950년대 이전 빈티지 만년필들에 이미 적용됐던 것들이다. 만년필은 이미 pre war 연식(2차 세계대전) 이전에 기술력 정점을 찍었고 그 이후로는 볼펜의 등장으로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빈티지 수집가이지만 꾸준히 현행 신제품들을 구매하고 사용해보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1950년대 이전의 감동을 느끼긴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느낌은 영화에서도 비슷하게 받는데 올드무비는 CG라는게 존재하기 전에 촬영하던 것이라 모든 것을 실제로 구현해내야 했다. 폭파장면을 찍는다면 실제로 폭파시키고 전쟁영화라면 군사박물관에 있는 실제 탱크를 움직이고 전투기를 날려야 했다. 아무리 CG기술력이 높아졌다 한들 실제촬영물과의 차이를 좁히긴 어려운 현실이다. CG로 범벅이 된 영화들 사이에서 현실주의 연출방식의 크리스토퍼 놀란 작품들은 항상 챙겨보게 된다. 몽블랑도 최근들어 소식을 들어보면 빈티지 만년필에 대한 내용들을 자주 다루는데 간만에 제대로 된 복각품을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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