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기구는 사람의 감정, 개성을 표현해내는 커뮤니케이션 매개체 역할을 해주었고 나아가 만년필이 등장하면서 그 만년필에 모양, 패턴, 색상, 필감 등 다양한 요소들이 가미되어 만년필 주인의 개성을 표현해내는, 필기구 이상의 도구로써의 역할을 하던 존재였다. 오늘날 손목시계와 비슷할 정도로 액세서리, 쥬얼리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부분은 ring top 모델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나 캡의 클립은 셔츠 주머니에 꽂혀있을 때도 강한 브랜드 이미지를 뽐내주었고 사용자의 필압, 필각에 따라 독특하고 개성 강한 필체를 그어주었다.
하지만 2차세계대전이 지나면서 새로운 소비개념이 등장하였는데 편의성, 경제성이 품질보다 우선시 되는 성향으로 점차 바뀌어가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전만 하더라도 기성품, 공산품 개념이 아니라 하나를 구입하더라도 일평생 함께 갈 수 있는, life time 보증의 개념이 확고했었다. 그 당시 등장한 메이저급 브랜드들의 life time, hundred year 모델들이 이를 증명해준다. 하지만 전쟁 이후 급변한 세상에선 쉽게 고장나고 쉽게 버려지고 제한된 보증기간을 두고 생산하는 다음과 같은 현상 등장하게 된다.
'계획된 노후화'(planned obsolescence)
이제 제조자들은 주기적으로 바꿀 수 있는, 쉽게 버려지는 제품들로 기존의 생산품 자리를 대체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제품에 그대로 드러나는데 예로 워터맨의 명기들의 펜촉은 점차 얇아져서 금 무게가 줄어들었고 몽블랑의 펜촉 하단은 커다란 구멍을 뚫어 코스트 컷(cost cut)을 한 모습들을 볼 수 있다. 또한 대량생산이 가능한 레진 재질, 즉 사출방식으로 생산이 가능한 플라스틱 재질들로 대체되었고 각 매장에서 간단한 수리가 가능했을 정도였던 수리의 개념도 축소되었다. 평생 쓸 수 있던 본래의 만년필이 지금은 소모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매료된 만년필의 매력은 만년동안, 일 평생을 사용할 수 있는 도구이기 때문이었다. 고장나면 고쳐가며 쓰고 쉽게 버려지지 않는, disposable의 개념과는 반대되는 도구여야 한다. 일정한 보증기간을 정하지 않고 당신이 구매한 시점으로부터 일 평생을 보증해 줄 정도로 장인정신을 담아 만들던 시절의 만년필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만년필이다. 그렇기에 빈티지 모델의 수식어구에 붙는 'pre war' 문구는 어떠한 모델이든 나를 설레게 만든다. 'planned obsolescence' 개념은 오늘날 더욱 심화되어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공산품에 적용되었다고 봐도 된다. 그나마 최근의 하이엔드 명품시계들은 2년 정도의 짧은 보증기간이 민망했는지 5년으로 늘리고 있는 추세이긴 하다.
현행 몽블랑은 생산원가는 과거에 비해 낮아졌지만 가격대는 해마다 오르고있다. 가격이 오르면 그만큼의 성능향상이나 재질의 변화가 있어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원가절감이 이루어지는건 이해하기 힘들다. 이러한 현상은 몽블랑의 고급화 정책, 즉 명품화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과거 명품 브랜드 제품들만 보더라도 이태리 장인이 한땀한땀 직접 제작했으나 지금은 이탈리아에 거주하는 중국인이 제조하고 있는 실정이니 말이다. 영어로 'Like a swiss watch'라는 표현이 있는데 한때 쓰기 민망했던 표현이다. 대부분 중국산 제품을 쓰더라도 스위스에서 조립만 하면 swiss made 마킹을 찍을 수 있었기 때문인데 지금은 기준이 높아지긴 했다. 이런 내막을 알고 오늘날 제품들을 뜯어보면 현행 명품에 정을 붙이긴 어렵다.
요즘은 점차 거슬러 올라가 가장 즐겨쓰는 연식은 1920년대 모델들이다. 만년필의 최전성기 시절은 1920~1930년대라고 판단이 설 정도로 매번 쓰는 펜들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전의 모델인데 당시 그들이 보증했던 100년의 보증기간이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펜을 쓰고있을 때면 소름과 전율이 돋는다. 이 짜릿함을 공유하고자 오늘도 빈티지 만년필들을 수집하고 수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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