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의 펜을 선택하는 기준은 총 10가지입니다.
상태, 필감, 사용성, 감성, 내구성, 수리용이, 가격, 가치, 무게감, 디자인. 한가지씩 어떤식으로 평가하는지 디테일하게 설명드려보죠.
<상태>
우선 상태. 아무리 귀하고 가치있는 만년필이라 하더라도 상태가 좋지 못하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구하기 쉽고 상태 좋은 저가형 모델의 필감이 더 좋을 수가 있죠. 상태를 체크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펜촉입니다. 이리듐이 충분히 남아있어야 하는데 대부분 오래된 펜들은 마모가 심한 상태죠. 애초에 공정과정에서 언밸런스하게 마감된 개체들은 조정 및 수리가 가능하기 때문에 문제가 안되는데 사용으로 인해 발생한 마모 자체는 복원이 불가합니다. 펜촉이 얇을수록 마모된 개체들이 많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음은 외관 상태를 체크해야 합니다. 빈티지 럭셔리 만년필의 수요가 늘자 독일 현지 복원가들이 폴리싱을 해버린 뒤 판매를 하는데 폴리싱 안된 개체를 선호합니다. 하드러버 재질의 경우 변색이 일어난 표면이 두껍기 때문에 폴리싱을 하게되면 레진처럼 살짝만 벗기는게 아닌 좀 더 깊이 벗겨내게 됩니다. 이에 따라 외관의 임프린트들이 희미해진 개체들이 많이 확인됩니다. 심지어 아예 임프린트가 사라진 개체들도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체크할 부분은 필러입니다. 피스톤 필러나 에어로매트릭처럼 구조가 단순한 필러는 작동이 안되는 경우 고장요소가 몇가지 없기 때문에 수리가 용이하지만 텔레스코픽 필러나 버큐매틱 같이 복잡한 구조의 필러는 내부에 들어가는 부품 자체가 파손되거나 삭아버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파손된건 복원이 가능하지만 삭아버리면 3D 프린터나 직접 조각하여 복원해야 하므로 주의가 필요합니다.
대부분 빈티지 만년필의 가치는 상태에 따라 천차만별이며 상태라는 요소 한가지의 차이만으로도 그 펜의 필감, 성능이 천지차이로 갈리게 됩니다. 당연히 수십년 이상된 물건이 민트급 상태라면 그 누구도 마음대로 가격을 정할 수 없습니다.
<필감>
만년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필감 요소. 일반적으로 필감은 펜촉이 클수록 손 끝에 느껴지는 정도가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변 지인들에게 시필을 시켜주면 대부분 대형닙이 좋다고 선택하죠. 거기에 단단한 펜촉이 아닌 살짝 탄성감이 느껴지면 붓을 쓰는 듯 하면서도 사각거리는 손맛이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몽블랑의 대형닙은 6호 이상으로 보며 가장 인기있는 사이즈는 9호입니다. 9호 이상의 12호 초대형 닙도 있긴 합니다.
개인적인 기준은 너무 붓처럼 낭창거리기 보단 활시위 같은 탄성감이 좋으며 마냥 부드러운게 아닌 적당한 사각거림, 저항감이 있어야 손맛도 좋고 사각거리는 소리에 귀도 즐겁습니다. 나중에 디자인 요소에서도 언급하겠지만 펜촉의 디자인 역시 빼놓을 수 없죠. 투톤의 절제된 미도 좋지만 쓰리톤의 화려한 모습은 포기하기 어렵네요.
<사용성>
빈티지 만년필을 수집하면서 1900년대가 아닌 1800년대까지 내려가면 사용성 그래프가 바닥으로 꺾여버립니다. 일단 셀프필링 시스템이 아니며 피드 안정성이 좋지 못해 아날로그 감성으로 느낄 수 있는 불편함 그 이상이 되어버리죠. 빈티지 제품을 수집하고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이 사용성 요소에서 적절한 타협이 필요합니다.
셀프 필링이 가능해야하며 피드 안정성이 확보되어야 합니다. 피드 안정성은 피드의 구조가 복잡할수록 높아지며 노트에 잉크를 쏟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잉크주입의 경우엔 복잡하고 까다롭더라도 잉크 주입량이 많으면 문제되지 않지만 주입도 힘든데 저장량이 적으면 사용성 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는 어렵습니다. 적당한 크기와 무게도 함께 체크할 요소이며 캡의 밀폐력도 중요합니다.
<감성>
사용성과 감성 두가지 요소는 함께 비교되어야 합니다. 몽블랑 기준이 절대적일 수는 없지만 다른 브랜드들과 일맥상통하므로 몽블랑 연도 기준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1920년대 셀프필링 시대가 열렸고 1950년대 만년필 생산의 정점을 찍고 그 이후로는 하락세 그래프를 그리게 됩니다. pre 60's 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이해가 되는 부분이죠. 그 중에서도 pre war 연식은 더욱 가치가 높습니다.
감성이란 다른 말로하면 불편함이 되겠지만 적당한 불편함은 그 행위를 통해서 재미를 느끼고 아날로그 감성을 느낄 수 있기에 취미가 되는 것이겠죠. 물론 기능 뿐만 아니라 디자인에서도 감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소 투박하지만 정성이 들어간 옛날 물건들의 모습에서 장인정신을 볼 수 있고 기계적인 심플함이 아닌 쓸데없는 복잡함에서 클래식함을 경험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볼펜, 샤프를 쓰는 경우 한번 노크해서 글씨를 적고 잉크를 다 쓰면 버리고 새걸 사는 루틴입니다. 반면 만년필은 캡을 열고 노브를 돌려 잉크를 주입하고 잉크가 피드를 타고 나오길 기다린 뒤 글씨를 적고 잉크를 다 쓰면 다시 노브를 돌려 충전해서 수십년간 사용하는 루틴이죠. 버려지는 물건이 아닌 오래오래 간직할 동반자입니다. 선물용으로 정말 좋은 아이템이지만 요즘에 만년필 선물하면 한번도 사용되지 않은 채 중고로 팔리는 신세죠.
<내구성>
거의 대부분의 빈티지 만년필은 정상적인 사용을 했다면 고장나거나 파손되지 않습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어떠한 기준에 비해 내구성이 좋지 않을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버큐매틱 필러, 텔레스코픽 필러, 플랜저 필러 등등이 존재하며 현행의 경우 오롤로이드 재질이 있습니다. 현행은 제외하고 빈티지만 이야기하면 확실히 구조적으로 복잡하면 단순한 필러들에 비해 고장이 잦은건 팩트입니다. 그렇다고 시계를 좋아하는데 오토매틱은 안차고 쿼츠만 찬다면 오토매틱 시장은 재기에 성공을 못했을겁니다.
복잡한 메커니즘일수록 사용하는 과정에서의 재미는 배가 됩니다. 특히나 텔레스코픽 필러의 2단 메커니즘은 노브를 잡고있는 손끝에서도 느껴지는데 끊임없이 돌아가는 노브가 매 순간 놀랍습니다. 그 펜을 이해하고 수리 노하우를 익힌다면 당연히 복잡한 필러를 써봐야하며 주위에 수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과감하게 도전하는 것도 좋습니다. 다만 이 글을 보고 애초에 고장난걸 저렴하게 구매해서 고쳐달라고 요청하시는건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에보나이트 피드에 대한 내구성 논란이 많은데 단순히 사용만 한 개체라면 99% 파손될 이유가 없습니다. 대부분 파손된 개체들은 도구 없이 손으로 돌려서 분해하려던 개체들이죠.오히려 파손되거나 찍혔을 경우 가열하여 재성형이 가능하므로 플라스틱 필러에 비해 수리가 용이한 장점이 있습니다.
<수리용이>
이 부분은 다양한 만년필을 접하지 못했을 때 꽤나 큰 비중을 차지했었던 요소인데 지금은 수리 불가한 케이스가 적어 크게 해당사항 없습니다. 수리하는데 필요한 시간 차이만 있을 뿐인데 수리가 편하면 물론 플러스 요인이긴 합니다. 수리를 워낙 많이 하다보니 지금은 복잡한 수리일수록 더 흥미진진하고 수리과정에서도 재미를 느끼고 있네요. 수리가 복잡할수록 점수를 더 주게되는 아이러니한 상태입니다.
수리가 가장 용이한 타입은 컨버터, 카트리지 필러이며 다음은 피스톤 필러입니다. 버튼 필러나 레버필러도 사실상 구조가 엄청나게 간단하고 수리하더라도 내부 고무 색 교체 정도라서 쉬운편에 속합니다. 손재주만 조금 있다면 만년필을 모르는 사람도 수리가 가능할 정도이니 고무 색만 준비해서 도전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가격>
가격도 무시할 부분은 아닙니다. 시계 수집에 비하면 한참 저렴한 분야긴 하지만 빈티지 아이템은 워낙 가격대가 천차만별이라 가격비교가 쉽지 않죠. 온라인상에서는 시세비교가 용이하기에 대부분 가격대가 높게 책정이 되는데 우리가 노려야 할 곳은 바로 현지 플리마켓입니다. 집에 있던 잡동사니를 가져와 좌판에 깔아두고 저렴하게 판매하는 사람들이 많기도 하고 요즘 필기구 자체가 비주류라 깨끗하고 상자까지 있으면 2~30유로 펜만 있으면 10유로 이정도에 팔리게 되죠.
간혹, 정말 가끔 그런 좌판에 귀한 모델이 10유로에 판매되는 펜들이 존재합니다. 저도 여러번 봤었고 판매자에게는 그냥 단순히 안쓰는 물건일 뿐이었죠. 오히려 전문 셀러보다 이런 곳에서 사는게 조합일 가능성도 제로입니다. 현행의 경우 디자인이 화려하고 반짝거려 비싸지만 오히려 빈티지는 오래돼고 낡아서 헐값에 팔리는 경우도 다반사죠. 스페인 플리마켓이 정말 화려했는데 해외여행시 명소만 들리는게 아니라 플리마켓은 필수코스입니다.
<가치>
가치 역시 가격과 연관되는 부분이죠. 역사적 가치, 희소성 등 여러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관여하는 부분인데 만년필 브랜드별 플래그쉽 모델이 가치가 높습니다. 몽블랑의 경우 몽블랑 149, 파카는 듀오폴드, 펠리칸은 m800 등이 있는데 각 모델들의 원형이 되는 모델의 가치는 엄청나게 높아집니다. 몽블랑의 139, 파카의 듀오폴드 빅레드, 펠리칸의 100. 또한 각 모델의 first issue 모델은 수집가치가 더욱 높아집니다. 빈티지 만년필 뿐만 아니라 다른 대부분의 빈티지 아이템에서 확인되는 공통적인 현상이죠. 역사적 요소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139 1938년식, 듀오폴드 1921년식, 100 1929년식. 보통 이런 극초기형 모델은 시제품이거나 사전생산분이기 때문에 개체수도 적어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런 연식들이 후기형과 디자인이 동일하면 그렇게 큰 가격차이도 나지 않을텐데 디자인이 다르기 때문에 더 가치가 높아지는게 아닐까 싶네요.
<무게감>
개인적으로 펜 외장에 금속 재질, 은이나 금이 발린 모델은 멀리하게 되더군요. 일단 펜의 무게는 가벼울수록 좋습니다. 무거운 펜과 가벼운 펜을 비교하며 써보면 쉽게 느껴질텐데 물론 동일 모델로 비교해야 합니다. 몽블랑 146 기준으로 기본 모델과 솔리테어, 버메일 모델을 캡 꽂지 않고 비교해서 써보면 확실히 기본 모델의 필감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짧게 서명시엔 힘 들이지 않고 부드럽게 무거운 펜이 좋을 수 있으나 오래 사용할 목적이라면 가벼운 펜을 추천합니다.
특히나 플렉시블한 펜촉을 가진 펜이면 펜이 가벼워야 그 활시위처럼 당겨지는 탄성감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죠. 몽블랑 149와 139를 비교하면 139의 크기가 더 작고 무게도 가볍습니다. 9호 사이즈 펜촉을 더 큰 감촉으로 느낄 수 있는거죠. 그래도 몇자루는 무거운 펜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예 배럴에 금속 재질이 들어간 펜은 한자루도 없네요. 지난번 수리 들어온 몽블랑 146 어린왕자 테스트하는데 펜이 자꾸 흘러내릴 정도였습니다.
<디자인>
머릿속으로 만년필 이미지를 떠올리면 일단 펜촉은 무조건 오픈닙이어야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오랜기간동안 149를 써와서 3톤 닙이 아니면 아쉬움이 남을 정도네요. 149의 유선형 디자인도 완벽합니다. 몽블랑에서 완성된 디자인이기에 70년 가까이 변경없이 유지된 것이기도 하겠지요. 그치만 뭐랄까 동양에서는 계란형 얼굴이 미인이라면 서양에서는 각진턱이 미인이듯이 149의 유선형과 139의 플랫 디자인은 각기 다른 매력이 느껴집니다.
디자인은 온전히 개인취향이 반영되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조언해줄 수 없는 부분이죠. 빈티지 만년필하면 대부분 파카51을 떠올리시겠지만 저는 아니듯이 취향차이라서 스스로 많이 비교해보고 다양하게 경험해보셔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만년필을 평가하는 10가지 요소들에 따라서 코멘트 해봤습니다. 텔레스코픽 필러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을 때는 139가 만점을 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모든 요소 만점이네요.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한 모델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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