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디자인의 기준이 몽블랑이라면 성능의 기준은 펠리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브랜드들이 채택하고 있는 피스톤 필러 메커니즘을 최초로 개발했으며 1930년대부터 사용해오고 있는 브랜드다. 거기다가 zero tool로 아무런 전용 툴 없이 맨손으로 완전 분해가 가능하고 클립역시 사용하다가 늘어졌을 경우 캡탑을 분해하여 간단하게 맨손으로 조정이 가능하다. 사용부터 직접 수리, 보수까지 용이한 유일한 만년필을 제작한 브랜드가 바로 펠리칸이다. 이러한 이점들은 현행까지 어느정도 이어지기는 했으나 빈티지 제품만하지 못하며 트위스비 등 일부 브랜드들이 분해 툴을 제공하지만 빈티지 펠리칸처럼 손쉽게 분해가 가능하진 않다. 어떠한 물건이든 내부에 액체를 저장하게 되면 오랜 사용에 따라 누수가 발생하는데 이 누수를 잡기 위해선 간편한 분해가 동반되어야 한다. 초심자부터 중급자, 고급자까지 모두가 오랜기간 직접 유지보수하며 사용할 수 있는 펠리칸은 오늘날 실용기의 대표모델로 인식되었다.
빈티지 펠리칸의 전모델을 사용해보았고 지금도 쓰고있고 주력기 리스트에도 올라있는 펠리칸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만년필계의 모나미 볼펜이다. 그만큼 실용적이고 사용이 간편하며 연식대비 타브랜드 타모델들에 비해 내구성도 우수한 편이다. 언제 어디서나 쉽게 사용이 가능한 컴팩트 사이즈에 가슴 포켓에 쏙 들어갈 정도의 사이즈에서 캡을 포스팅하였을 때 충분히 길어지는 길이감은 마치 여행용 만년필을 연상케 할 정도다. 그렇지만 잉크 충전량은 절대 여행용이 아니며 모든 파츠는 쉽게 분해되어 어디가 고장나거나 파손되었을 경우 간단하게 교체도 가능하다. 오늘날 간혹 해외 플리마켓에서 펠리칸 빈티지 만년필이 온전하지 않은 채로, 부품으로만 다수 모아져 판매되는 경우를 보게되는데 매장에서 간편하게 수리하기 위해 제조단계부터 설계된 부분이 아닐까 생각든다. 오래 사용하기 위해선 수리가 간편해야 하며 수리가 간편해야 잘 만든 물건임이 인정된다. 아무리 완벽한 물건이라 한들 고장났을 때 수리가 불가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은가.
오늘날 만년필은 대형기가 표준으로 자리잡혀 있지만 과거엔 딱 펠리칸 100, 400 시리즈의 규격이 가장 표준이었다. 서양인들의 큰 손 기준에서도 표준규격이 몽블랑기준 4호라는 말이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필기구 사이즈를 보더라도 대부분 연필, 모나미 볼펜, 샤프 두께를 넘어가지 않는다. 미국에서도 가장 많이 판매되는 필기구가 BIC 볼펜인데 그 볼펜은 모나미볼펜과 비슷한 두께와 길이를 가진다. 또한 가장 많이 판매된 브랜드 볼펜인 파카 조터 역시 그 사이즈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만년필이라는 필기구가 처음 등장했을 때도 배럴 두께가 굉장히 얇았고 그나마 셀프필링 메커니즘이 등장하면서 조금 두꺼워졌을 뿐이다. 내부에 잉크를 충전해야하고 충전하는 메커니즘을 내장해야 했기 때문인데 그로인해 만년필이 다른 필기구 대비 두꺼워진 것이지 만년필이 두껍다고 오는 이점이 크진 않다는 것이다. 필기구의 본질을 보면 어떤 만년필을 선택해야할지 감이 오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만년필을 써오고 수리해오면서 느끼는 바이지만 오버사이즈 만년필이라고 해서 손에 느껴지는 장점이 크지 않다.
개인적으로 만년필을 제조함에 있어서 오히려 두께가 얇고, 작게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 만년필이 작을수록 충전 메커니즘을 축소시켜야 하며 내부 공간을 최적으로 활용하여 잉크가 저장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부분에서 펠리칸 320 모델을 굉장히 높게 평가한다. 사진으로만 보면 감이 잘 안오는데 실물로 보면 엄청나게 작고 심지어 그 작은 크기에 카트리지도 아닌 피스톤 필러 메커니즘이 들어가 있다. 오히려 이런 메커니즘들을 큰 볼륨에 집어넣는 것은 굉장히 간단하다. 작게 만드는게 어려울 뿐이다. 다만 만년필이 작아짐에 따라 따라오는 단점이 있는데 바로 펜촉의 크기다. 만년필이 작아지면 자연스레 펜촉의 크기도 작아지고 펜촉이 작아지면 필감의 전달력도 줄어든다. 이러한 현상의 해결점은 작은 만년필을 선택하고 태필을 선택하면 된다는 것이다. 펜촉이 작아도 티핑이 크다면 연성감은 줄어들지언정 종이와 티핑이 맞닿는 필감 자체는 크게 줄어들지 않는다. 물론 동일 닙 사이즈로 4호와 9호 차이는 분명 나겠지만 작은 닙으로 B닙 이상을 선택한다면 큰닙의 F닙 이상은 커버가 된다는 것이다.
만년필은 다른 필기구들과는 달리 정말 다양한 선택지 옵션들이 있으니 다양하게 써보고 직접 느끼고 판단하며 취향을 찾아가야 한다. 단순히 필기 목적이라면 만년필은 굳이 추천하지 않는다. 잉크를 충전하는 번거로움, 심지어 휴대시 잉크가 뚜껑에 쏟아지며 현행 빈티지 상관없이 불편함은 피할 수 없다. 오히려 이정도 불편함이라면 조금 더 불편하고 빈티지 감성을 느낄 수 있는 빈티지 만년필이 낫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요즘 좋은 볼펜들, 샤프들 나오니 최신 제품들을 쓰는 재미도 쏠쏠하기에 신상 필기구를 추천한다. 만년필이라는 필기구를 쓸거면 빈티지를 쓰는게 감성적인 측면에서 더 낫다는 것이다. 요즘 시대에 만년필을 편리하기 위해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래 전 과거의 향수를 느끼고 아날로그 감성을 느끼기 위해 사용하는 것인데 만년필의 모양을 한 만년필도 아닌 제품을 쓰는 건 문제가 있어보인다. 그래서 파카 인제뉴어티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게 아닐까? 만년필을 만들거라면 만년필의 본질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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