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블랑보다 한참 뒤쳐졌던 펠리칸의 만년필이 독일 만년필 브랜드의 양대산맥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영세 만년필 브랜드들의 메이저 브랜드를 뒤쫓는 것이 아닌 독자적인 길을 택하고 펠리칸 고유의 정체성을 확립해 갔던 것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한다. 펠리칸 만년필의 핵심 타이틀은 실용성이었다. 애초에 만년필 브랜드도 아니었고 각종 문구류, 화방용품등 다양한 제품들을 취급했기에 굳이 만년필 제품군에 다양성을 추구하지 않아도 됐던게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1980년대 전까지의 펠리칸은 확고했다. 한손에 들어오는 작은 사이즈, 방대한 잉크 저장량을 위한 피스톤 필러만을 고집. 만년필 역사상 최초 등장한 플래그쉽 모델이 현재까지 같은 잉크 주입 방식을 택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펠리칸의 플래그쉽 모델은 1929년도부터 2021년 지금까지 피스톤 필러만을 사용하고 있다.
작은 소형닙 사이즈지만 닙 사이즈도 EF부터 OBB에 이르르며, K닙 계열, R닙 계열, S닙 계열까지 여타 브랜드에서 취급하지 않는 폭 넓은 옵션을 취급했다. 다만 레인지는 넓었을지 몰라도 각 펜들의 품질이 균일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아쉬운 점인데 이는 펜촉에서도 크게 나타났다. 몽블랑 닙의 균일한 품질을 따라가지 못했던 것은 펠리칸이 만년필이 메인인 브랜드가 아니었기에 현실적인 한계가 아니었을까. 전쟁을 거치면서 점차 해소된 문제긴 하지만 전쟁시기 CN닙까지 이러한 모습은 여전하다. 그래서 같은 닙 사이즈를 구하더라도 필감이 다르고 획 두께가 다르며 리뷰를 남기더라도 편차가 심해 개체마다 리뷰를 남겨야 하는 문제가 오늘날 발생하고 있다. 물론 NOS 개체를 선별하여도 마찬가지다. 몽블랑 빈티지를 사용할 때는 모델별 필감이 어느정도 예상이 되지만 펠리칸은 매번 새로운 느낌이다.
Oblique닙 계열을 처음 쓴다면 추천하는 브랜드는 개인적으로 몽블랑 보다는 펠리칸을 추천한다. 같은 OB닙이더라도 몽블랑 146의 닙과 펠리칸 100의 닙은 티핑 면적에서부터 차이가 나며 엣지 마감 역시 펠리칸쪽이 보다 소프트하여 스위트 스폿을 찾아내기 더 용이하다. 엣지 마감이 앵글이 살아있다 하더라도 펠리칸은 소형닙이라 핸들링이 수월하다. 사용감을 비교한다면 몽블랑 146 기준 OB닙이 펠리칸의 OBB와 비슷한 체감을 보여준다. 사용 난이도는 낮아졌지만 그만큼 몽블랑에 비해 극적인 필감을 내주지는 못하는게 단점으로 나타난다. 각 브랜드별 장단점이 있지만 사용자체가 어려운 경우 필감이 좋냐 안좋냐의 문제는 2차적인 문제가 되므로 우선적으로는 난이도가 낮은, 접근성 좋은 펠리칸의 오블리크 닙들을 추천하는 것이다.
글이 써지는 획 두께를 보더라도 몽블랑의 OB가 펠리칸의 OBB와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이는 146, 149 위로 올라갈수록 더 커지며 단순 사이즈만 놓고 본다면 144와 100 시리즈를 비교하는게 기준점이 비슷하다. 현행 몽블랑은 스탠다드 사이즈가 6호이기에 6호랑 비교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빈티지 모델로 비교를 한다면 4호닙과 100 시리즈가 같은 라인으로 보는게 맞다. 4호닙 OB닙과 비교를 하더라도 반사이즈 정도 몽블랑이 더 두껍게 그어진다. 연성감은 CN닙이라 한들 연철 계열을 사용하여 부드러운 연성감을 선사해주므로 스틸닙이라고 현행처럼 단단한 필감을 예상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pd 닙도 결국 팔라듐으로 백금족이라 무른 소재이므로 연성감을 선사해주는 것은 금촉과 마찬가지다.
CN닙이라 하면 크롬니켈 합금 닙으로 니켈에 크롬을 첨가하여 내산화성과 내식성을 높인 재질이다. 만년필 닙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내산화성과 내식성을 높인 것으로 이후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저가형 모델에 사용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스테인레스 스틸이 철과 크롬, 니켈의 합금이다. 만년필 분야에선 스텐닙, 스틸닙, CN닙 통칭하여 사용하게 된다. 스틸닙도 크게 두가지로 나뉘게 되는데 팁 마감에 이리듐 용접이 들어가는 것과 양쪽을 프레스기로 눌러 티핑 형태로 가공해내는 것이다. 스틸 재질도 이리듐과 같은 강화합금에 비하면 내마모성이 낮다.100 시리즈의 경우엔 이리듐 마감이 들어가며 전쟁 이후 저가형 모델에 이리듐 없이 단순 스틸닙이 장착된 모델들이 시장에 선보이게 된다. 이들은 완벽히 대량생산, 소모적인 만년필로써 평생 사용이 아닌 일정기간 사용 후 버려지는 계획된 노후화의 보급화를 보여준다.
티핑의 마감은 동일할 지언정 금의 무른 감촉과 연철의 무른 감촉은 사용함에 따라 손끝으로 느껴지기에 취향이 갈리게 된다. 14k, 18k, Pd, CN 닙의 재질도 만년필을 선택하는데 굉장히 큰 요소이므로 단순히 디자인만 볼게 아니라 펜촉 재질도 본인 성향에 맞는게 무엇인지 찾아가는게 중요하다. 필자의 경우 처음부터 18k였고 20년 가까이 만년필을 써오면서도 결국은 18k가 가장 만족스럽다. 금 함량을 더욱 높인 20k, 21k 닙들도 있으니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걸 추천한다. 다만 이러한 닙 재질은 시대에 따라서도 차이가 발생하므로 시기별로 나눠서 시필해보는게 중요하다. 빈티지 스틸닙은 명백한 연성이지만 현행 스틸닙들은 대부분 초강성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
CN닙이 장착되던 시절의 펠리칸 100 시리즈는 피스톤 필러에 변화가 찾아온다. 피스톤 헤드인데 코르크 재질에서 레진 재질로 바뀌게 된다. 피스톤을 동작하는 느낌이 크게 바뀌게 되었고 피스톤 헤드의 교체 주기도 훨씬 길어졌다. 1940년대 당시였다면 수십년간 씰을 교체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지금은 1세대 레진 씰 피스톤의 경우 수축된 개체들이 많아서 필히 점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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