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하이엔드 만년필과 독일의 하이엔드 만년필은 메커니즘면에서부터 큰 격차를 보인다. 몽블랑의 잉크 충전 메커니즘 중 레버필링 방식은 1920년대까지만 제작되었고 30년대 넘어서면서 점차 사라진 방식이다. 몽블랑에서의 레버필러는 아이드로퍼 타입의 세이프티 방식 이후 최초로 적용된 셀프필링 메커니즘이지만 몽블랑의 독자적인 기술력을 선보이기엔 한계가 있어 하이엔드 모델에는 버튼 필러가 적용되는데 이때 단순 카피가 아닌 개량형 푸시 노브 필러로 장착된다. 이후 펠리칸에서 피스톤 필러를 선보이는데 피스톤 필러보다 우월한 필러를 만들고자 텔레스코픽 필러가 등장하게 되었다. 레버필러의 부품수는 프레스바, 레버, 고무튜브, 프레임, 연결핀 5개 정도로 간단하게 구성되는 반면 텔레스코픽 필러는 너트, 씰, 스터드, 이너스크류, 아웃스크류, 슬리브 로드, 슬리브 너트, 수평 고정구, 수직 고정구, 클러치, 와셔 2종, 필러 스레드, 노브 정도로 10여가지 이상 부품수로 구성되는데 여기서 추가적으로 세분화하면 20가지에 육박한다. 사실상 잉크충전 메커니즘만으로도 139를 넘어설 만년필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이즈를 비교해보면 우선 패트리션은 길이감은 139와 비교대상이겠지만 두께감은 136과 비슷한 수준이다. 손으로 쥐어봐도 136 두께감과 비슷한데 펜의 무게 자체가 크게 차이 나기 때문에 139와는 확연히 다른 사용감을 보여준다. 여기서 펜의 성향이 크게 갈린다. 무게 차이가 큰데다 139는 내부 메커니즘이 금속 파츠들로 구성되어 상당히 묵직한 느낌이다. 반면 패트리션은 부품수가 최소화된 레버필러 방식에 부피는 크더라도 내부 공간이 확보되어 굉장히 가벼운 무게감이다. 거기에 펜촉은 138과 비슷하여 대형닙의 폭이 넓은 필감을 선사해주므로 보다 손끝에 전달되는 느낌이 강하다. 오히려 무게 밸런스를 뒤쪽이 아닌 중심부에서 분산시켜주었고 두께감은 확보하면서 무게를 가볍게 해주어 굉장히 산뜻하면서도 손맛 좋은 필감을 내주는 모델이다. 개인적으로도 몽블랑 139를 정말 좋아하지만 쓰다보면 어떨 때는 패트리션이 끌릴 때도 있고 어떨 때는 139가 끌려서 어느 한자루만 쓴다는 것은 사실상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파카 듀오폴드 빅레드와 패트리션을 비교해가며 써보면 느껴지는데 확실히 배럴쪽의 레버 필러와 바텀쪽의 버튼 필러, 필러의 위치 차이 만으로도 무게 밸런스가 어느정도 이동되며 손에 쥐었을 때의 느낌에서 차이가 발생한다. 잠깐 쥐어봐도 차이가 느껴지는데 장시간 필기를 한다면 그 차이는 더 크게 느껴진다. 기술력, 메커니즘적 측면에서의 아날로그 감성, 기계적 감성등을 따진다면 단순히 몽블랑 139에 편향되겠지만 손끝에 전달되는 펜촉의 감촉을 생각한다면 부품수만 보고 쓰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만년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필감이기에 이 부분은 더 크게 다가온다. 자동차에 비유한다면 스포티한 움직임을 위해 중형 이하의 차량을 운전하는 것과 묵직한 승차감을 위해 대형 차량을 운전하는 차이라고 보면 된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1929년 등장해서 30년대 중반에 사라져버린 패트리션이지만 미국이 아닌 유럽도 1차 세계대전 이후 1910년대~1920년대에 걸쳐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1930년대 초반까지 영국은 경제불황, 실업문제 등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고 이러한 현상은 주변국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때 영국은 자국의 경제회복을 위하여 자유무역을 중단하고 보호무역으로 정책도 바뀌었으며 당시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여러가지 노력이 있었다. 유럽국가에서 경제상황의 흐름은 금본위제와 평가절하 두가지를 보면 되는데 평가절하를 채택한 영국, 스웨덴, 덴마크 등과 금본위제를 채택한 폴란드, 프랑스, 벨기에 등의 경제회복력 차이는 극과 극을 달렸다. 이 당시 독일은 외환통제 정책과 완전고용 정책으로 경제회복을 꾀하였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나치다. 미국과 독일의 경제회복은 두 국가 모두 1930년대 중반 이후 시점으로 볼 수 있는데 미국에선 뉴딜정책을 보면 된다. 미국과 유럽에 걸쳐 경제회복이 이루어진 시점이 패트리션의 단종 시점과 겹치는 점이 아쉬우면서도 신기한 부분이다.
30년대 말 독일은 우월주의와 나치즘으로 가득했고 그 당시의 기술력으로 생산된 펜이 몽블랑 139라는게 역사적 측면에서는 괴리감이 느껴진다. 정리하면 2차 세계대전 이전 시점에서 대공황, 경제불황을 겪을 때 등장한 모델이 워터맨의 패트리션이고 경제가 회복되면서 나치즘이라는 우월주의 사상 하에 등장한 모델이 몽블랑의 139다. 간혹 몽블랑의 나치관련된 일화가 돌기는 하는데 펠리칸과 비교해서 본다면 왠지 납득이 되는 부분이 존재한다. 실용주의를 추구했던 펠리칸의 피스톤 필러와 쓸데없이 많은 부품으로 우월주의 사상이 녹아든 듯한 몽블랑의 텔레스코픽 필러를 본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단순히 필기구 관점, 실용주의 측면에서 본다면 굳이 피스톤 필러를 두고 텔레스코픽 필러를 쓸 이유가 없다. 하지만 당시의 차별성, 기술력 과시, 개성 등의 요소들을 본다면 몽블랑 고유의 특징이자 장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바라보는 관점 역시 만년필이라는 아이템 자체가 아날로그 감성을 느끼기 위한 것이며 그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몽블랑만의 특유의 감성이기에 그 가치는 계속해서 높아져 가는 것이다. 오토매틱 시계의 컴플리케이션 라인업으로 본다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정말 기본 기능인 크로노그래프만 보더라도 실생활에서 라면 끓일 때 이외엔 쓰는 곳이 없지만 굳이 그 기능을 탑재함으로써 기계적 감성, 기술력, 아날로그 감성을 끌어올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년필을 바라보는 관점은 절대적으로 실용적인 잣대가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느정도 사용성 정도는 볼 수 있겠지만 애초에 최선책이자 차선책인 볼펜, 샤프가 존재하기 때문에 실용성이 논외라는 것이다. 실용적인 면을 보는 순간 그건 만년필을 제대로 즐길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다. 빈티지 모델에 대한 입문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물론 볼펜이 싫어 굳이 만년필을 실생활에서 쓰고자 하는거라면 잉크충전량, 안정성, 휴대성 등 실용적인 요소들을 두고 비교하여 선택할 수는 있겠지만 2021년인 지금 만년필을 즐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날로그 감성을 느끼기 위함이 아닐까. 1930년대를 보더라도 모든 만년필이 개성없이 단순한 필기구의 포지션이었다면 다양한 잉크충전 방식이 존재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며 디자인도 일률적이었을 것이다. 만년필은 당시의 개성표현의 수단으로 사용되었고 그 안에 기술력을 녹아내어 심미성까지 느낄 수 있는 필기구 그 이상의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패트리션은 외적인 요소로써 워터맨의 개성, 독창성을 표현하였고 몽블랑은 몽블랑만의 텔레스코픽 필러 메커니즘으로써 기술력을 표현하였다. 두가지 모델은 성향 자체가 완벽히 다른 모델이며 필감, 사용감도 물과 기름처럼 비슷한 교집합을 찾기 힘들다. 비슷한 시기의 플래그쉽 하이엔드 모델이지만 한발 빠르게, 한발 늦게 생산시기가 갈림으로써 펜의 운명이 달라져버렸다. 과연 두 모델의 생산시기가 반대였다면 과연 결말이 바뀔 수도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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