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등장 이전의 시대. 19세기 필기도구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에 대한 의구심이 100년도 넘은 물건에 손을 대게 만들었다.
빈티지 칼럼에서도 확인했듯이 만년필 등장 이전에는 딥펜, 연필이 주를 이루었는데 그 두개를 섞어둔, 멀티 펜이 존재했었다. 사실 이런 기능성 필기구가 19세기에 존재했을거라는 예상은 못하고 있었다. 해외 지인 중 하나가 이런 앤틱 필기구를 좋아하는 바람에 계속 보다가 펜촉과 샤프가 동시에 배출되는걸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만년필의 시초가 워터맨이라 하면 샤프의 시초는 샘슨 모단이라고 한다. 1800년대 초반 특허 출원이 되었는데 이외 유명한 브랜드로는 에버샤프가 있다. 스완 역시 워낙 오래된 브랜드라 비슷한 필기구 라인업 생산품이 있다.
일단 내가 처음 마주했던 19세기 필기구는 위 모델처럼 양쪽으로 배출되는 방식이 아닌 앞쪽, 한쪽 통로로 샤프와 펜촉이 함께 배출되었다. 더 초기형 버전인 것인데 아무래도 샤프는 쓰다보면 심이 한쪽만 닳아버려 돌려가며 써야하는데 한쪽만 배출되는 타입은 공간확보를 위하여 샤프 선단이 한쪽에 쏠려버린다.
위 사진과 같은 느낌으로 유격감도 크고 사용감이 떨어져서 후기형 버전으로 갈아타게 되었다. 물론 한쪽만 배출되는 타입의 매력도 분명 존재한다. 하단부가 넓어지는데 테이블 위에 세워둘 수도 있고 돌려서 열면 샤프심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또한 아름다운 돌을 깎아 넣어 미적인 요소를 가미할 수도 있다.
제작되는 재질은 순은이다. 풀 스털링 실버 재질이라 생각보다 약하다. 쉽게 변형이 오고 단단한게 아니라 말랑한 느낌이랄까. 조심히 다뤄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 바로 인그레이빙, 조각이다. 펠리칸의 토레도 시리즈처럼 외관의 모든 조각이 수공으로 제작되는데 가까이서 보면 더 매력적이다. 이게 150년 전 감성인걸까.
사용방법은 간단하다. 중결링 2개가 보이는데 이를 바깥쪽으로 잡아 당기면 샤프 선단, 펜촉 선단이 튀어나온다. 샤프부터 사용감을 리뷰해보면 우선 리드는 1.14mm 심 보다 얇다. 1mm 정도 되어 보이는데 현존하는 규격은 아니다. 몽블랑 픽스 샤프 쓸 때도 심 구하기 힘들었기에 대량으로 구비해두었다. 오히려 후기형 샤프심 규격보다 얇아서 쓰기가 훨씬 편하다. 심 배출은 샤프 선단의 하단 톱니를 돌려주면 된다. 위쪽의 톱니는 선단을 분리하여 샤프심을 넣는 곳을 여는 부분이다. 확실히 초기형의 한쪽에서만 배출되던 타입에 비해 돌려가며 쓰기가 편안하다. 유격도 훨씬 줄었고 유격이 느껴지더라도 펜텔의 메카니카에서 느껴지던 말랑거리는 유격이 느껴질 뿐이다.
펜촉은 사이즈에 맞는 펜촉을 구해서 입맛에 맞게 끼워 사용하면 된다. 다만 주의점이 배럴 내부에 들어갈 사이즈를 감안하여 펜촉을 구하는게 좋다. 펜촉이 너무 와이드하면 배럴 내부로 수납이 불가하다. 살짝 안맞는 펜촉은 살짝 닙을 구부려 끼워넣어도 되는데 구부리는 과정에서 슬릿 정렬이 틀어질 수 있다. 만년필처럼 피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펜촉 자체에 잉크가 매달려 글씨가 써지는 딥펜 방식이기에 티핑이 완벽하게 닫혀있어야 하고 종이에 맞닿는 면이 고르게 정돈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잉크가 쏟아져버리거나 아예 글이 안써질 수 있다. 딥펜 펜촉은 슬릿에 매달려 있던 잉크가 슬릿이 살짝씩 벌어짐과 동시에 글씨가 써지기 때문에 굉장히 연성 필감이다. 티핑의 개념이 없던 시절이기에 보다 사각사각거리고 낭창거리는, 우리가 떠올리는 빈티지 필감의 그 너머를 느낄 수 있다.
딥펜이라고 글자를 몇자 못적는게 아니다. 펜촉 타입에 따라 다르지만 워낙 세필이라 필압을 주지 않고 쓴다면 한번 디핑으로 A4 사이즈 노트 2줄 이상 채울 수도 있다. 물론 필압을 주며 캘리그래피를 한다면 몇자 적지 못한다. 펜 크기 자체는 굉장히 작지만 뿜어내는 오라는 상당하다. 150년의 세월이 묻어난다는걸 말로 표현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런 펜들 역시 당연히 휴대용 목적으로 고안되었고 잉크를 넣고 휴대할 수 있는 통도 함께 판매되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970~1980년대에 학교 수업에 펜글씨 수업이 있어서 한국빠이롯드 잉크와 펜촉을 볼펜대에 꽂아 들고다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런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현존하는 필기구들은 100년, 200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 그 원형을 마주하게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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