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빈티지의 기준이란 지극히 주관적인 부분이다. 빈티지의 뜻 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는데 명칭의 유래는 와인에서 시작된다. 정확한 뜻은 와인을 만들기 위해 포도를 수확한 해인데 보통 와인을 구매하면 레이블에 연도가 프린팅 되어있다. 레이블에 연도가 적혀있지 않은 와인들도 존재하는데 그런 상품들은 그해 수확된 포도가 아닌 지난 해의 포도로 만들어진다. 명칭은 논빈티지 와인으로 부른다. 빈티지 와인이 값이 더 비싸고 사랑받는 이유는 그 해 포도농사의 품질에 따라 와인의 향과 맛에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와인에서 쓰이던 빈티지라는 용어는 패션쪽으로 넘어와 빈티지 패션이라는 단어를 발생 시켰는데 의미가 조금 더 넓어져 레트로의 뜻까지 함축하게 되었다.
따라서 빈티지 만년필의 경우 일반적으로는 각 브랜드들의 전성기 시절 제작된 모델들에 붙는 수식어구가 되었는데 그 기준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정답 하나를 내기는 어렵다. 나 같은 경우엔 몽블랑을 처음 접했던 시기가 00년대인데 그 당시 몽블랑은 확실히 여타 브랜드들에 비해 필감이 월등했었다. 지금은 pre 60's, pre war 연식을 선호하지만 몽블랑의 첫 경험을 00년대 모델로 시작했고 요즘 나오는 모델들보다 강렬한 인상이 남아 빈티지로 칭하고 있다. 정확히 따져보면 흔히 우리 머리 속에 떠올리는 오래된 빈티지 만년필은 앤틱, 올드, 클래식이라는 수식어구가 더 적합하다. 그치만 우리가 올드펜만 다루지 않기 때문에 빈티지 만년필이라는 명칭으로 정리하는게 좋지 않을까 싶다.
그런 관점에서 펠리칸의 90년대 모델은 빈티지 연식일지 셀리브리 P590을 직접 써보면서 판단해보았다. 우선 전형적인 90년대 스타일의 기본 틀은 가지고 있다. 얇은 배럴, 푸쉬풀캡, 얇지만 메탈 재질을 사용한 묵직함 등. 이런 디자인은 90년대 국내 만년필 회사들에도 영향을 끼쳐 비슷한 형태의 펜들을 확인할 수 있다. 클래식한 디자인을 내세우는 펠리칸의 새로운 도전 정도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90년대 전형적인 스타일이라고는 했지만 기본 뼈대를 채용하고 부분 부분 개성적인 요소들이 가미되어 있어 익숙하지만 뻔하지 않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펠리칸 부리의 클립은 유지되었고 캡과 배럴 사이 간격을 두어 캡을 닫은 생태에서 흔하지 않은 모습이다. 배럴의 패턴은 자연스럽게 도색되었는데 질감은 도자기 느낌을 준다. 배럴 하단부로 갈수록 점차 얇아지고 바텀 부위에 그립부 캡과 걸리는 스토퍼를 똑같이 내주어 캡을 뒤에 꽂아도 쉽게 빠지지 않게 처리하였다.
그립부는 손으로 쥐는 부분은 매트하게 처리하여 미끄럼 방지를 해주었는데 펜촉이 짧아서 길게 쥐고 쓰게되어 별 효과는 없었다. 잉크 충전방식은 카트리지와 컨버터를 사용하는데 펜 무게가 생각보다 묵직하다. 개인적으로 펜이 무거워지면 펜촉의 자극이 현저히 줄어드는 점이 아쉬운데 해당 모델은 경성에 길들일 필요 없이 티핑이 가공되어 있어 필압 없이 펜의 무게만으로 부드럽고 편안하게 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빈티지에 데인 사람들이 길들이는 과정을 즐기지 못하고 현행만 쓰게되는 가장 큰 이유가 이 부분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연필도 처음 날카롭게 깎으면 끝 심이 부러지고 거친 필감이다가 점차 부드러워지며 기분 좋은 사각거림을 주는 것 처럼 만년필도 마찬가지다. 가죽 신발도 처음 신었을 땐 굉장히 딱딱하고 뒷꿈치가 까지기도 하지만 부드럽게 길들여지면 그 어떤 신발보다 편안한 착용감을 선사해준다. 그 길들여지는 시점이 올드펜들은 조금 오래 걸리는데 그 시점을 넘겨본 사람은 빈티지만 쓰게된다. 물론 처음부터 부드럽고 시원한 흐름을 준다는건 마감 품질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관점으로 볼 수 있다.
빈티지 만년필을 많이 접하지 않았던 시절엔 경성이어도, 부드러운 필감이어도 브랜드마다 차이가 있었고 그 차이점을 비교하여 보다 재밌는 필감을 향해서 나아갔었다. 자극이 점점 강해진 탓일까, 이젠 마냥 부드러운 필감은 만년필로 느껴지지 않는다. 빈티지 만년필을 파고들수록 이런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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