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칸 만년필의 정점을 고르라면 당연히 100이다. 다들 펠리칸의 대표모델을 떠올리면 m800이겠지만 빈티지 100을 써본 사람이라면 오버사이즈에 현혹되지 않는다. 특히나 그 중에서 100 초기형인 새끼 펠리칸 4마리가 그려진 로고 연식은 펠리칸 만년필의 성배나 다름없다.
1929년 처음 등장한 펠리칸 100은 극초기형 모델의 경우 캡 밴드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파카 51에 빗대어 보면 파카 51 역시 first year 모델은 알루미늄 쥬얼이 장착되지만 재료 부족, 내구성 문제 등으로 인해 플라스틱 쥬얼로 바뀌게 된다. first year 기간 동안, 즉 첫해 안에 변화가 이루어지므로 pre-production(사전 생산분)이 아니라면 플라스틱 쥬얼인게 맞다. 그래서 해외 수집가들 사이에서도 first year의 특징을 알루미늄으로 특정 짓지 않는 추세이다. 이는 유럽의 만년필 스쿨의 교과서에도 실린 내용이다.
100은 1931년도에 캡 밴드가 2줄 생기고 닙에 하트홀이 heart-shape에서 그냥 원형으로 바뀌게 된다. 사실 heart-shaped hole이 아닌 부분은 굉장히 아쉽긴 하다. 그렇다고 해도 캡 밴드가 없는 100도 아쉽다. 그래서 단 한자루의 빈티지 100 시리즈를 고르라면 바로 31~35년식 모델이다.
100은 우스갯소리로 히틀러가 썼던 만년필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증명된 바는 없지만 당시 100의 풍부한 잉크 저장량, 컴팩트한 사이즈로 휴대성을 높이고 고풍스러운 디자인은 고위직 신분의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던건 사실이다. 오늘날 보더라도 100 시리즈의 디자인은 전혀 촌스럽지 않고 오히려 앤틱하며 클래식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크기는 작지만 오버사이즈 만큼의 아우라를 풍기는 만년필은 100 시리즈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100 중에서도 초기형 특징은 캡탑이 봉긋하며 검정색 파츠는 모두 하드러버 재질이 사용된다. 잉크창은 갈색이며 펜촉은 스트레이트 가공으로 플렉시블함이 강조된다. 티핑은 얄쌍하게 가공되어 펜을 쓰면 사각거림이 방 안에 울려퍼질 정도다. 중요한 부분은 피드인데 3 lammelar 구조를 갖고 가운데 세로 형태의 comb는 뿌리 부분에서 컷어웨이 된다. 100 후기형에선 뿌리까지 커팅 없이 이어지며 이는 100N, 400 시리즈까지 이어진다.
여기서 31년식 ~35년식 사이에도 변경 포인트가 몇군데 있는데 체크하고 넘어가자. 먼저 31년식 초기형의 경우엔 그립부 끝부분의 곡률이 날카롭지 않고 완만하다. 반면 후기형은 나팔의 끝 부분 형태처럼 마감이 된다. 또한 극초기형 모델의 닙 사이즈 마킹은 따로 없는데 35년식부터 EF, F 등의 각인이 피드 우측면에 인그레이빙 된다. 이후 노브쪽 각인으로 옮겨져 간다.
워낙 구분 포인트가 많아서 정리해둔 자료를 보지 않으면 헷갈릴 정도다. 변경 사항도 몽블랑 시리즈보다 마이너하기 때문에 정리를 잘못하면 쉽게 뒤섞여버리곤 한다. 일단 100을 제대로 오랫동안 사용하려면 코르크 가공법을 익혀두는게 중요하다. 피스톤 필러지만 피스톤 씰이 코르크 재질이기 때문에 코르크를 직접 깎아 넣는 재미가 있다. 물론 규격에 맞는 레진 씰을 장착하면 코르크 깎을 일 없이 오랜기간 사용이 가능하지만 그럴거면 100을 쓰는 의미가 없다고 본다.
100을 쓰는 이유는 전용 툴 없이 분해가 간단하기 때문에 필름카메라의 필름을 직접 교체해서 촬영하듯 코르크 씰 역시 직접 깎아 넣어 사용하는 아날로그 감성을 느껴야 감동이 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코르크 가공은 생각보다 쉽다. 처음엔 감이 잘 오지 않는데 일단 이너배럴 내경의 지름만 알면 끝난다. 지름에 맞게 코르크를 대충 자르고 원형으로 칼로 대충 깎은 뒤 거친 사포로 둥그렇게 다듬어 가면 된다. 나 같은 경우엔 수리를 하고 있기에 규격에 맞는 코르크 커터를 따로 주문제작 하였다. 두께만 씰 홀더에 맞추고 쿠키 찍어내듯 찍으면 바로 커팅이 되는데 사실 재미는 직접 깎아야 느낄 수 있다. 어차피 소모품이라 부담도 적고 사이즈에 맞지 않아도 워낙 피스톤 로드가 튼튼하기에 맘 편히 작업하면 된다.
텔레스코픽 필러의 기계적 감성을 느낄 수는 없지만 보다 심플하고 직관적인 구조로 만년필의 기본을 느낄 수 있는 펜이다. 기본 중에 기본을 느껴보고 싶다면 펠리칸 100 시리즈를 추천한다.
한자루의 펠리칸 100 시리즈를 고른다면? (0) | 2020.08.19 |
---|---|
펠리칸 500NN, 1950년대 빈티지 만년필 (0) | 2020.08.19 |
골든 디스크, 일명 더블코인 (펠리칸 m800 1987 first year, 14c gold nib) (0) | 2020.07.28 |
펠리칸 100 블랙 vs 100N 블랙 색상 비교 (0) | 2020.07.20 |
펠리칸 100N 블랙 빈티지 만년필 리뷰 (0) | 2020.07.20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