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빈티지 펠리칸에 빠져 중고로 30여자루를 구매했었는데 결과는 아래와 같았다. 이건 그나마 상태가 양호해서 무료나눔을 했던 부품들이고 나머지는 크랙이 있거나 변형이 와서 사용 자체가 불가능했다. 30자루 중 건진건 10여자루 뿐. 수리 할만한 펜들은 수리해서 지인들 나눠주고 상태좋은 나머지 몇자루는 중고나라에 판매했다. 심지어 민트급이라고 비싸게 준 만년필들도 문제가 꼭 하나씩은 있어서 한동안 멀리 하고 지냈다.
원체 펜 자체가 1930~1940년대 생산된 펜이라 제대로 된 개체를 구하기가 너무 힘들다. 그러다가 독일에 사는 친구녀석이 내가 펠리칸에 한 맺힌걸 알고선 펠리칸 전문 컬렉터를 소개해줬는데 그 이후로 모든 펠리칸에 대한 갈증이 한방에 해소되었다. 소개받은 분은 처음부터 펠리칸만 썼고 1929년식부터 2000년식 모든 시리즈를 소장하고 있을 정도였다. 정말 놀라웠다. 몽블랑 149만 연식별로 모으기도 힘들었는데 펠리칸 모든 시리즈를 연식별로 모았다니, 외제차 2~3대는 거뜬하게 뽑았을 견적이다.
그 정도로 열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펠리칸은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을까? 일단 1930년대 만년필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련된 디자인이다. 짧고 뭉툭한게 귀엽고 바디의 그린 마블은 굉장히 트렌디한 느낌이다. 잉크창도 시원하게 뚫려있어 잔량 체크를 수월하게 했고 피스톤 필러 방식은 잉크 저장량을 방대하게 늘리고 고장 또한 쉽게 나지 않는다. 거기에 멋드러진 금장 클립은 현대 펠리칸의 부리 모양은 아니지만 가슴 포켓에서 빛나기에 충분하다.
1931년식 펠리칸 100은 완성된 연식이다. 1929년식은 펠리칸 자체 펜촉이 쓰이지 않았고 캡에 금장 링이 없어 허전하다. 펠리칸 100 시리즈를 떠올렸을 때 흔히 우리가 아는 디자인은 1931년식이다. 캡탑의 로고는 여전히 최초의 펠리칸 만년필 로고가 새겨져있다. 4마리의 새끼 펠리칸과 어미 펠리칸이 복잡하긴 하지만 이 로고 하나로 시세가 엄청나게 급등한다.
캡과 그립, 노브 부위는 하드러버 재질이 사용되었다. 하드러버 특유의 쿰쿰한 향기는 빈티지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호박색 잉크창 역시 부드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금색 원톤 14k 펜촉도 너무 튀지 않게 잘 녹아든다. 펜촉은 스트레이트 형태의 가공으로 스프링 연성 펜촉처럼 서예를 하듯 필기가 가능하다. 이런 연성 펜촉을 감당하기 위해 에보나이트 피드가 장착되고 피드 구조는 심플하여 아주 풍부한 잉크흐름으로 공급해준다.
피드의 열은 3열이고 가운데 열 하단은 깎여있다. 100N은 깎인 것 없이 이어지며 100N 후기에서 4줄로 바뀌고 400 시리즈에서 역시 4줄 피드로 생산된다. 3줄의 피드가 잉크 흐름이 더 풍성한 경향을 보인다. 내구성이 약한 편이라 파손된 개체가 많으니 구입시 유의하기 바란다.
1931년식 특징으로 그립부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데 이후 연식부터 나팔모양으로 곡선이 가파라진다. 개인적으로 완만한게 더 클래식한 느낌을 줘서 100에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하드러버 재질이라 마감이 벗겨진 경우 물에 닿으면 노랗게 변색이 오는데 이를 주의해야한다. 세척은 최대한 펜촉만 담그도록 하고 캡, 노브엔 물이 닿지 않게 하길 바란다.
물에 안닿게 한다고 물티슈로 닦아내는 경우도 있는데 똑같이 황변이 오니 주의해야한다. 최대한 습기로부터 멀리하자. 내부 피스톤 필러는 오늘날 피스톤 필러 구조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굉장히 심플하다. 다른점은 피스톤의 헤드 부분인데 햄버거 형태로 위 아래 플라스틱 고정부 안에 코르크 씰을 결합하는 형태를 갖는다.
코르크 씰은 사용할수록 마모가 크기 때문에 오래 사용하기 어렵다. 주기적으로 왁스 작업을 해주고 밀폐력이 떨어지면 코르크를 새로 교체해줘야 한다. 와인 병이나 샴페인 병에 들어가는 코르크를 써도 되는데 추천하는 방법은 따로 코르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업체를 찾아 밀도가 아주 높지 않은 제품을 구매해서 작업하는게 좋다. 밀도가 너무 높으면 코르크의 경도가 높아져 피스톤의 밀폐력을 높이기 어렵다. 그렇다고 너무 밀도가 낮은 제품을 쓰면 내구성이 떨어지니 눌러봤을 때 적당한 탄력이 있는게 좋다.
펠리칸 100은 구매 후 바로 사용이 어렵다. 일단 전반적으로 상태 좋은 개체를 찾아야 하는데 시작부터 난관이다. 괜찮은 개체를 구하면 코르크 씰 작업을 해줘야 비로소 쓸 수 있는 상태가 된다. 분해는 어렵지 않다. 전용 툴 없이도 상태가 좋은 개체라면 노브쪽을 천으로 잡고 시계방향으로 돌리면 피스톤이 분해가 된다.
반시계 방향이 아니다. 시계 방향으로 돌려야 필러 스레드가 분해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반시계 방향으로 돌리면 배럴이 깨져버리니 주의하자.
크기는 149와 비교하니 굉장히 앙증맞다. 뭐 어떤 펜이든 149와 비교하면 귀여워지긴 하지만 100은 더 작아보인다. 149는 149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고 100도 그 나름의 유일한 매력이 있다. 두 펜 모두 빈티지 만년필을 쓴다면 꼭 한번 써봐야 할 모델이다.
아직 국내엔 펠리칸 100 시리즈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크지 않은 느낌이다. 펜을 써본 사람도 많지 않고 사이즈가 작거나 코르크 씰이라서 일단 피하고 보는 경향이 있다. 빈티지 만년필에 관심이 있다면 이것저것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전 처음 써보는 방식의 필링 시스템을 써보는 재미도 굉장히 쏠쏠하기 때문이다. 피스톤 필러만 해도 여러가지 파생된 스타일이 존재한다.
펠리칸의 코르크 씰은 초보라도 시간만 투자한다면 사포로 갈아내며 제작도 가능하고 분해도 어렵지 않아 강력 추천한다. 만년필을 쓰며 잉크를 직접 채워넣고 주기적으로 피스톤 헤드에 왁스 작업을 하며 가끔 코르크를 깎고 다듬으며 교체를 해주는 재미는 빈티지 만년필로 느낄 수 있는 매력들의 종합선물세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굳이 수집가치로써의 단점을 한가지 꼽자면 제치의 상태로 써보기 힘들다는 점이 한가지 존재하지만 어떻게 생각해보면 컨버터와 다르게 코르크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소모품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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