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도까지만 하더라도 펠리칸에서 대형기 모델은 찾아볼 수 없었다. m400이 주력기였고 m600 모델도 존재하였으나 크기는 400과 동일했다. 80년대 m600은 m400의 상위트림이었을 뿐 더 크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만년필을 처음 출시했을 때 부터 꿋꿋이 이어오던 고집이었으나 경쟁사인 몽블랑의 대형기 모델들이 50년대에 스파크가 튀면서 7~80년대 들어서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한 모습을 보고 그대로 보고 있을 수 만은 없었던 펠리칸 경영진의 판단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첫 등장은 1987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2월 박람회였고 독일 내수 출시는 그 해 연말이었다. 펠리칸의 150주년 기념모델로 출시하여 오리지날 케이스에는 150주년 기념 마크가 들어간다. 우드 소재로 제작된 고급스러운 케이스였는데 당시 몽블랑의 선물용 고급 케이스에 대항하기 위하여 케이스까지 변경되었다.
최초 m800은 블랙과 그린 컬러로만 출시되었고 이후에 블루, 레드가 하나씩 추가되었다. 추가적으로 m400과 m800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하여 m600 모델의 사이즈가 커지게 되었는데 그 시기는 90년대 말에 들어서야 오늘날 규격으로 자리 잡았다. m150부터 200, 300, 400, 600, 800 그리고 1000까지 오늘날 다양한 선택지를 제안하지만 800 등장 전까지는 굉장히 보수적이고 400 규격의 기본 사이즈만을 고집해왔다. 가장 오랜 기간 한가지 사이즈만 만들어 왔기에 400 규격의 만년필 중 가장 밸런스가 좋기도 하다. 실질적으로 m800은 149의 대항마가 아니라 146의 경쟁모델로 출시되었고 이후 149의 대항마로는 m1000이 출시되었다. 언뜻 보면 플래그쉽 모델이기도 하여 149와 비교대상으로 언급되지만 실질적으로 쥐어보고 사용해보면 146과 밸런스가 비슷하다. m600 등장을 기점으로 소버렌 시리즈가 시작되는데 m800 등장을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
m800 역시 극초기형에는 아낌없이 쏟아 부었지만 이후 인기를 얻고 대량생산에 들어가면서 원가절감이 이루어지게 된다. 대표적으로 클립의 도금인데 본래는 22k 전기도금이지만 이후 90년대부터 18k 전기도금으로 하향한다. 모든 요소가 하향한 것은 아닌데 닙의 금 함량은 반대로 14k에서 18k로 금함량이 높아진다. 이는 당시 스위스, 프랑스 등의 수출용 모델로 18k가 제작되면서 변경되었다. 도금과 함께 하향된 요소가 한가지 더 있는데 바로 닙 사이즈 옵션이다. 본래는 EF부터 OBBB까지 아주 많은 옵션을 제시했으나 수요 감소로 인해 축소되었다. 펜촉의 마감 품질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마감 편차는 연식이 낮을수록 줄어들게 되는데 일반적이지만 m800 모델은 오히려 최근 모델일수록 편차가 큰 편이다.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펠리칸의 매출은 괜찮았는데 그때 선보였던 한정판이 브라운 토토이즈 쉘 모델이다. 그때 신품으로 2자루를 구매했는데 2자루 모두 티핑 마감이 형편 없었다.
펠리칸 m800은 실용성 만년필의 상징인데 그러한 별명을 갖게 된 이유는 크게 세가지다. 메모용으로 적절한 잉크흐름과 캡의 밀폐력, 그리고 방대한 잉크 저장량이다. 과거 빈티지 모델들은 잉크 흐름을 피드로 조절하지 못했고 슬릿으로 조절하였는데 m800의 피드 완성도는 상당히 우수하여 현행 플라스틱 피드 중 가장 높은 수준으로 꼽힌다. 거기에 캡의 밀폐력도 높아 한달 이상 사용하지 않고 방치해도 닙 마름 없이 캡을 열고 바로 사용이 가능하다. 피스톤 필러 메커니즘의 대명사 답게 잉크 충전량도 충분하고 거기에 EF닙 세필과 맞물리면 언제 충전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동안 사용이 가능하다. 이러한 특징들을 살려 고시용 만년필로 쓰고 싶다면 개인적으로 연성감 있는 빈티지 보다는 현행의 경성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배럴의 결합방식 특성상 146에서 빈번한 그립부 누수도 적고 도금 이슈를 제외한 내구성은 좋은 편이다.
너무 장점들만 나열했는데 단점을 꼽으라면 필감이 밋밋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빈티지 개체들이 인기가 높지만 역사가 짧아 구하기도 쉽지 않다. 고시용 만년필, 필기머신 등 이러한 별명이 붙는 모델들은 대개 필감에서 손맛을 느끼긴 어렵다. 이따금씩 m800이 생각 날 때가 있지만 결국 몇페이지를 채우곤 다시 서랍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다시금 낭창거리는 100을 꺼내들게 된다. 글을 쓰기 위함이라면 고민없이 m800을 추천하지만 필감을 느끼기 위함이라면 재고해보길 바란다. 사실상 14c의 연성감 있는 필감도 현행대비 좋다는 것이지 100에 비하면 애교수준의 감촉이라 절대값으로 높은 점수를 주긴 어렵다. 14c 연성감을 확인하기 위하여 크게 선호하지도 않는 세필 닙을 꺼내 들었고 내가 정리하고 있는 14c 닙의 특징들은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획 자체의 변화정도는 EF가 가장 넓고 필감은 F닙부터 굉장히 부드러운 버터필감을 내준다. 하나의 펜촉을 고르라면 단연 OBB닙이고 빈티지 m800을 경험해보지 못한 이에게는 어떤 닙을 선택하든 현행 이상의 감동을 선사하리라 확신한다.
극초기형 펠리칸 100 빈티지 만년필 개체편차 (feat.4마리 새끼 펠리칸 로고) (0) | 2024.02.23 |
---|---|
펠리칸 m800 first year 1987년식 EF닙 시필 (0) | 2024.02.02 |
n번째 펠리칸 m800 퍼스트이어 14c닙, 여전히 연성 필감 (1) | 2024.01.30 |
몽블랑, 펠리칸 매니아들의 축제, 독일 펜쇼 (1) | 2024.01.23 |
빈티지 펠리칸 만년필, 만년필 성능의 기준 (0) | 2024.01.16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