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지 질문을 해본다. 만년필 수집을 취미로 하면서 과연 본인의 컬렉션 중에 매일같이 3년 이상 사용한 만년필이 한자루라도 있는가? 만년필 펜촉은 길들여지려면 직업이 작가가 아닌 이상 다이어리, 일기를 쓰는 수준으로는 2~3년 정도 소요된다. 필기량이 많은 편이라면 1년 정도면 되겠지만 대부분이 그렇지 못할 것이다. 나조차도 한자루를 쓰다가 다른 펜을 쥐고 또 바꿔 쥐기에 정말 찰떡같이 길들여졌다 느끼려면 5년은 걸리는 듯 하다. 만년필은 길들이는 도구이다. 펜촉이 사용자의 필각, 필압에 맞게 변형되고 마모되었을 때 나만의 펜이 된다. 초보자라면 만년필을 쓰는 과정에서 필각이 계속해서 변화하고 필압도 점차 빠져가기에 아직 이번에 추천하는 만년필을 쓰는건 무리가 있다. 어느정도 본인의 스타일이 확립되었을 때 커스텀 만년필을 추천한다. 유럽에서도 일부 만년필 매장에선 구매자의 필각, 필압에 맞게 닙을 조정해주긴 하지만 나카야 수준으로 커스터마이징 해주진 않는다. 비유하자면 기성복 매장에서 팔 길이, 다리 길이 정도만 수선하는 것과 맞춤정장의 차이 느낌이다. 나카야는 펜촉 디자인, 연성과 경성을 고르는 것 부터 시작한다. 이후 닙 커스터마이징이 들어가는데 필압, 그립의 위치, 필기 속도, 글자 크기, 필기체와 정자체, 필각, 펜촉 방향, 왼손잡이 오른손잡이를 여러단계로 선택한다. 만년필에 있어서 거의 모든 요소들을 취향에 맞게 조정이 가능한 것이다.
본인에게 완벽히 길들여진 펜을 써본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특히나 요즘같이 필기구가 멀어지고 바쁜 현대사회에선 더욱이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아예 길들여진 수준의 닙 커스터마이징이 된 만년필을 쓰는건 센세이셔널한 경험을 줄 것이다. 가격도 타사 제품들에 비하면 비싸지도 않다. 오히려 이정도 커스터마이징이 들어가기에 저렴하게 느껴진다. 몽블랑 146 현행 판매가가 99만원인걸 보고 새삼 놀라웠다. 146이 149 가격이 되어버린 것. 나카야에선 배럴을 에보나이트(기본 옵션) 재질로 선택하여 제작하면 7~80만원 선에서 구매가 가능하다. 펜촉의 베이스는 플래티넘사 제품을 이용하는데 플래티넘의 창립 사명이 본래 나카야 펜 컴퍼니였다. 근래들어 서구권에서도 일제 만년필이 각광을 받고 있는데 그만큼 품질이 인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만년필 시장이 전세계 중 일본이 가장 활발한 모습이다. 나카야 오프매장도 여러군데 있으며 도쿄에 밀집해 있다. 다만 커스텀 만년필이기에 만년필의 대략적인 느낌, 밸런스나 그립감 정도 경험해보고 커스텀 주문은 사이트에서 진행하면 된다. 커스텀 특성상 제작기간은 몇개월 소요된다. 가장 최근에 의뢰했을 때가 6개월 안쪽으로 마무리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번에도 의도치 않게 펜의 사이즈는 146, m800과 비슷하다. 배럴 뒤쪽은 149, m1000과 비슷하지만 그립감과 펜촉은 146, m800 스펙이라고 보면 된다. 물론 펜의 크기를 더 키울 수도 있다. 본인의 취향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피드가 에보나이트 재질이 아니며 옵션으로 선택도 불가하다. 동일 브랜드의 게더드 빈티지 에보나이트 피드가 호환은 가능하나 커스터마이징이 플라스틱 피드 기준으로 작업되므로 굳이 추천은 하지 않는다. 필기 속도에 맞게 슬릿간격 조정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여러 일본의 커스텀 만년필 업체들이 있으나 나카야 수준만큼 만족도가 높지 않았으며 제품의 마감, 품질은 가격대비 만족도 최상이다. 다만 기분탓인지 몰라도 수년전 작업했던 펜과 요즘의 펜 완성도가 미세한 차이를 보이는 느낌이 든다. 외관 마감은 비슷한데 펜촉 마감이 달라서인지 필감 차이가 존재한다. 아마도 작업자가 바뀐게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현행 만년필 중 가장 만족도가 높으며 앞으로 나카야 이상의 만족감을 선사할 브랜드가 없을거라 생각한다. 내 손에 맞게 길들여져있는 만년필을 바로 쥘 수 있는 메리트는 다 떠먹여주는 것과 다를바 없다.
이렇게 몽블랑146, 펠리칸 m800, 나카야 세가지 만년필을 골라보았다. 공감할 수도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일단 써본다면 후회는 없을거라 확신한다. 길들이는 과정에서 재미를 느낀다면 기성품 두 펜을 선택하면 되고 길들여진 느낌으로 바로 쓰고 싶다면 커스텀 제품을 선택하면 된다. 개인적 판단으로는 대부분이 길들여짐에 대해서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수집가들이 많을 것이라 판단되므로 커스텀 만년필을 써보는걸 추천한다. 만년필이란걸 좋아한다면 죽기 전에 제대로 길들여진 필감이란게 어떤건지는 느껴봐야 하지 않을까? 단순히 커스텀 닙이 내 필기습관에 맞게 조정되었다는거 뿐만 아니라 어느정도 길이 잡힌 펜촉으로 쓰게 된다면 지금 이상의 길들여짐이 보다 수월한 장점이 있다. 마치 표지판이 없는 길을 가다가 네비게이션을 장착한 느낌이랄까. 다시금 상기시키지만 만년필은 길들여졌을 때 진정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도구다. 이 때문에 중고만년필을 쓰게되면 이미 본인에게 맞지 않는 방향으로 슬릿이 열리고 티핑이 마모되어 있어 본인 필각에 맞게 쓰게되면 헛발질, 거친 필감이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이를 내 필각에 맞게 바로잡아 쓰는 것은 어려우며 잘 나오는 필각대로 쓰게되니 본인만의 필기습관 형성에 어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새 펜을 쓰더라도 성격이 급해 빈 종이에 8자를 휘두르고 닙 조정을 해버리는 것은 재미를 반감 시키는 행위다. 천천히 한글자 한글자 정성스럽게 길들이다 보면 어느순간 흐름이 터지고 한단계 이상의 이상적인 필감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길들이는 것에 대해서 무심하게 넘겨버리는 이들이 많다. 새 자동차를 사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텐데 신차 엔진의 부품들은 표면 마감이 거칠게 된 부분들이 있어 어느정도 부드럽게 작동시켜주면서 매끄럽게 만들어주어야 한다. 자동차 매뉴얼에도 엔진 길들이기에 대해 강조되어있다. 신차를 길들인 이후 엔진오일을 갈아보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오일필터에 미세하게 쇳가루들이 묻어난다. 자동차를 길들이는 기간에 고RPM으로 엔진에 무리를 가하는 경우는 마치 흐름이 트이지 않은 만년필을 길들인답시고 강한 필압으로 슬릿을 벌리는 행위와 비슷하다. A4용지는 아주고운 사포와 비슷한 수준의 질감인데 그곳에 강하고 빠르게 여러차례 8자획을 그리는 것도 추천하지 않는다. 중고차, 렌트카를 타는 이들이 풀악셀 밟으며 대충 타다가 중고시장에 넘기는 것처럼 만년필도 비슷하지 않을까. 만년필 입문자이고 예산이 충분하지 않다면 저가형이라도 신품을 구매해 쓰는걸 강력히 추천한다. 길들여졌을 때의 필감은 가격에 상관없이 이상적인 필감을 주는 것은 변하지 않으니 말이다.
일본 나카야 수제 만년필 구매방법 (0) | 2021.01.11 |
---|---|
커스텀 만년필의 매력, 나카야 수제 만년필 (0) | 2019.10.30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