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 제품을 수집하는 이들이라면 2차 세계대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1차 세계대전은 2차대전과 다르게 오히려 세계화의 쇠퇴를 불러 일으켰기에 논외로 보면 된다. 영화나 서적에서도 2차대전은 자주 소재로 다루지만 1차대전 소재를 다루지 않는 이유는 전쟁을 통해 얻은 교훈도 없고 전세계를 황폐하게 만들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2차대전 당시 군에서 사용했던 기술, 소재들이 민간에 응용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흔했는데 이점도 있으나 부작용을 일으킨 케이스도 많다. 안좋았던 경우는 대표적으로 탱크에 사용되었던 발수코팅제 테프론이다. 듀폰이라는 미국 기업이 그 테프론을 후라이팬에 사용했는데 발암물질이 포함되어 있어 후라이팬을 제조했던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사용했던 일반인들까지 암에 걸려 사망에 이르렀던 사고가 있었다. 전쟁 시기 중에서도 전시와 전후 두가지로 나뉘게 되는데 전시의 경우 군사물자 공급만으로도 인력, 자재가 부족하기에 공산품, 사치품의 품질 저하도 따라오게 된다. 그 예시로 전시에 제작된 만년필들에는 금촉이 들어가지 않는다. 쉐퍼 pfm 역시 초기 모델들에는 금촉이 아니라 팔라듐촉이 장착된다.
신기하게도 오늘날 거론되는 불후의 명작들의 탄생 시기는 각 국가들의 번영시기들과 맞물리는데 미국의 경우 1950년대 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 가장 높은 성장률을 보이다가 1970년대 들어서면서 성장동력이 떨어지는데 쉐퍼의 pfm 모델 역시 1960년대까지 생산되고 단종된 모델이다. 이전의 쉐퍼 펜들은 작고 얇아 휴대성과 실용성이 강조된 디자인을 취했는데 pfm이 등장하면서 쉐퍼의 기조는 새로워졌다. 가격대도 높아졌고 인레이드 닙, 금장캡 등으로 고급펜 이미지를 강조하는 듯 보여진다. 다만 pfm은 그렇게 오랜기간 인기를 누리진 못하고 1968년도에 단종된다. 1959년 등장하여 1968년 단종으로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사라진 것이다. 만년필 자체에 대한 평은 좋았기에 시기적 물림이 좋지 못하였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당시 1970년대 들어서면서 만년필 사업 자체가 큰폭으로 꺾이며 하향세로 돌아섰다. 만년필 사업 뿐만 아니라 철강 등 다양한 제조업들이 불황을 맞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pfm의 버전은 5가지가 존재하는데 1부터 5까지 총 5가지 버전이다. 컬렉터들 사이에서 거론되는 선호연식은 3버전이다. 우선 1과 2버전은 금촉이 아닌 팔라듐촉으로 제외되는 경우가 많고, 4번과 5버전은 파카51과 동일하게 금속 캡으로 구성되어 있다. 직접 손에 쥐어보면 알겠지만 pfm의 경우 펜이 쉐퍼 모델들 중에선 크지만 다른 대형기에 비하면 작은 사이즈이기에 손이 아주 작지 않고서는 캡을 끼우고 쓰는게 밸런스가 좋다. 따라서 캡의 무게가 가벼울수록 좋은 밸런스를 주는데 4버전과 5버전처럼 금속 캡이 끼워지면 뒤쪽으로 무게밸런스가 크게 치우치게 된다. 파카51과는 캡 구조가 달라 캡 무게감에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클립은 스프링 타입으로 장력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Autograph 버전도 존재하는데 버전3와 동일하게 생겼지만 캡 밴드가 14k 금으로 이루어진 것이 달라 희귀품으로 여겨진다. 이외 파카51에서도 보여졌던 바와 같이 데몬스트레이트 모델들이 존재하여 잉크 주입 방식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든, 판촉용 모델들도 존재한다. 쉐퍼의 트레이드 마크인 화이트 도트는 버전2부터 들어간다. 컬러는 블랙, 블루, 그린, 버건디 4가지 색상 옵션이 있다.
pfm이 등장하면서 쉐퍼에는 인레이드 닙의 새바람이 불었는데 이후 출시되는 임페리얼, 타가, 레가시 등에도 계승되어 디자인을 따르게 된다. 특히나 2000년대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던 쉐퍼 레가시 모델은 pfm의 복각 버전처럼 동일한 디자인으로 오랜기간 사랑받았다. 개인적으로도 쉐퍼 레가시의 디자인을 좋아하여 애용했는데 다만 필링 시스템은 컨버터 타입이다. pfm의 필링 시스템은 스노클 방식이며 스노클은 잉크를 낭비하지 않는 가장 완벽한 시스템이 아닐까 생각한다. 잉크병에 잔량이 많지 않아도 파이프를 내밀어 주입이 가능하며 잉크주입시 펜촉에 묻은 잉크 얼룩을 융이나 티슈로 닦아낼 필요가 없다. 펜촉에 묻은 잉크를 닦아내는데도 생각보다 많은 양의 잉크가 낭비된다. 잉크 주입량은 피스톤 필러에 비하면 적지만 배럴의 밀폐력만 제대로 보존되어 있다면 일반 컨버터 타입 수준의 잉크주입량을 보여준다. 주사기가 펜촉에 달려있는 셈이라 병잉크를 바닥까지 쓸 수 있다는게 가장 큰 메리트가 아닐까 싶다. 다만 배럴에 들어가는 고무 오링이 경화되어 밀폐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는 오링의 주기적인 교체가 필요하다. 배럴에 크랙이 가지 않는 이상 크게 수리할 부분은 없는데 사용하기 까다롭고 유지보수가 어렵다는 고정관념이 생긴 것이 안타까운 필링 시스템이다.
유지보수, 수리 난이도만 본다면 버큐매틱, 텔레스코픽 필러보다 쉬운게 스노클 필러다. 충전방식이 특이하고 재밌기에 빈티지 감성을 신선하게 느껴보고 싶다면 스노클 필러를 강력 추천하는 바다. 캡은 삼점식 푸쉬풀 타입으로 그립부에 결합되는 금속 파츠가 3포인트로 튀어나와있어 캡과 맞물리며 고정된다. 캡 내부에는 홈이 나져있어 금속 파츠가 홈에 들어간다. 결속력이 꽤나 좋은 편이지만 개체편차에 따른 캡 여닫음을 알 수 있는 경쾌함이 부족하다. 어떤 의미냐면 캡을 깊숙히 넣어도 이게 닫힌건지 덜 닫힌건지 구분이 모호하다는 뜻. 익숙해지는 부분이기에 큰 문제는 없다. 캡은 뒤쪽 배럴에 깊숙히 박혀 캡을 꽂고 쓸 때의 무게 밸런스가 이상적이다. 배럴은 충분히 두껍기에 뒤쪽 노브를 세게 닫는것에 따른 크랙 발생 염려는 덜어도 좋다. 추가적인 고질병은 인레이드 닙에서 스며 나오는 잉크인데 이는 닙 파츠를 오버홀한 뒤 실링 작업을 해주면 해결된다. 피드는 에보나이트 재질로 잉크 흐름이 풍부하며 경성닙으로 연성감을 느끼긴 어렵다. 단단하고 정직한 필감을 선호하는 이들에게 추천하지만 빈티지 특유의 사각거림은 연성닙보다 꾸준히 느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피드 안정성은 양호한 편. 펜을 흔들어도 피드로 잉크 흐름이 연식 대비 적은 편이다.
유지보수시 주의할 점이 한가지 있는데 스노클 파이프 관련 부품들이다. 해외 커뮤니티에서 일컫는 부품명으로 설명을 하자면 일단 스노클 튜브와 색 부싱 파츠가 존재하고 그 뒤로 색 프로텍터가 결합되는데 이 결합되는 방식이 나사산이나 끼워지는 방식이 아닌 금속을 펜치로 오무려서 고정시키는 방식이다. 따라서 빈번하게 분해결합을 하게되면 색 프로텍터 앞부분의 금속이 부러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고무 색이 내부에 들어가기에 고무 색 교체를 자주 하지 않는 이상 이 파츠를 분해할 필요는 없다. 고무색은 한번 제대로 교체한다면 최소 10년 이상의 수명은 보장되기에 불필요한 수리는 지양하길 바란다. 빈티지 만년필 관리의 가장 큰 중요한 요소는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워낙 오래된 물건이기에 궁금하다고 찝찝하다고 열고 뜯다보면 없던 문제들이 생기는 경우가 다반사다. 스노클 필러는 전혀 어려운 필러가 아니다. pfm이 부담스럽다면 저가형 스노클로 도전해봐도 좋다. 빈티지 만년필은 다양한 잉크 주입 방식을 경험할 때 비로소 제대로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스노클 필러의 등장은 만년필에 있어서 오늘날 삼성의 폴더블 폰 등장과 같은 센세이셔널한 등장이었다. 1960년대 당시의 그런 감성을 2022년 오늘 느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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